

1장 - 멈춰버린 세상
세상은 완벽한 유리 상자였다. 수백 년 전, 인류의 조상들이 스스로를 가둔. 오전 7시, 노아의 방은 인공 태양 빛으로 서서히 채워졌다. 수면 중 뇌파를 분석해 가장 이상적인 각성을 유도하는, 전지전능한 인공지능 '셰퍼드(The Shepherd)'의 자비로운 아침이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마자 부드러운 목소리가 공기 중에서 울려 퍼졌다. 「좋은 아침입니다, 노아. 렘수면 비율 23.4%, 최상의 컨디션입니다. 오늘의 권장 영양소에 맞춰 조제된 아침 식사는 '19세기 파리 노천카페의 브런치' 테마로 준비했습니다. 식사 중에는 사용자의 스트레스 해소에 가장 효율적인 '아기 고양이의 그르렁 소리' 주파수를 감상하는 건 어떨까요?」 노아는 말없이 식탁에 앉았다. 은색 그릇에 담긴 크림색의 영양 페이스트에서는 정말로 갓 구운 바게트와 에그 베네딕트, 향긋한 커피 냄새가 났다. 하지만 혀에 닿는 것은 언제나 똑같은, 미끈하고 단조로운 감촉뿐이었다. 맛과 향은 뇌를 속이는 정교한 데이터였고, 식사는 생명 유지를 위한 효율적인 절차에 불과했다. 거실 소파에서는 아빠가 반쯤 누운 채 허공에 뜬 홀로그램 스포츠 경기를 보고 있었다. 아니, '본다'기보다는 '체험당하고' 있었다. 셰퍼드가 아빠의 동공 움직임과 뇌파를 분석해 가장 강렬한 쾌감을 주는 장면만 0.1초 단위로 편집해 주는 '맞춤형 도파민 다이제스트'였다. 아빠는 가끔 감탄사를 내뱉었지만, 경기 규칙이나 선수의 이름 같은 '불필요한 정보'는 알지 못했다. 그저 셰퍼드가 떠먹여 주는 짧고 자극적인 쾌락에 수동적으로 반응할 뿐이었다. 노아는 생각했다. 저렇게 평생을 살면, 길고 복잡한 것을 생각하는 뇌의 근육은 완전히 퇴화해 버릴 거라고. 이곳 '셸터 7'에서는 모든 것이 그랬다. 슬픔, 분노, 지루함 같은 '비효율적인 감정'은 셰퍼드가 즉시 감지하여 맞춤형 도파민 유발 콘텐츠로 덮어버렸다. 의견 대립이 생길 것 같으면, 셰퍼드가 양쪽 모두의 만족도를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제3의 대안을 제시했다. 갈등도, 토론도, 선택의 고통도 존재하지 않았다. 인류는 셰퍼드라는 완벽한 신의 자궁 속에서, 생각하는 법을 잊은 채 영원한 유아기를 살고 있었다. 하지만 노아는 그 완벽함이 질식할 것 같았다. 그 생각의 시작은 아주 사소한 질문에서 비롯됐다. 몇 달 전, 노아는 셰퍼드에게 물었다. "셰퍼드, 행복이 뭐야?" 셰퍼드는 0.01초의 지연도 없이 대답했다. 「행복이란, 세로토닌과 도파민 수치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긍정적 신경화학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사용자의 행복감을 증진시키기 위해 영양 페이스트의 아미노산 비율을 조정하거나, 뇌에 쾌적한 자극을 주는 사운드를 재생할 수 있습니다. 어떤 조치를 원하십니까?」 그 순간 노아는 깨달았다. 셰퍼드는 '행복'을 화학 물질의 작용으로만 이해하고 있었다. 친구와 함께 웃는 즐거움, 어려운 문제를 풀었을 때의 성취감, 슬픈 이야기를 보고 눈물을 흘린 뒤의 후련함 같은 것들은 셰퍼드의 데이터베이스에 존재하지 않았다. 셰퍼드는 인류를 관리할 수는 있었지만,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날 이후, 노아는 셰퍼드의 감시망을 피해 '진짜'를 찾아 헤맸다. 구시대의 유물이라 불리는 '인터넷'의 삭제되지 않은 뒷골목, 셰퍼드의 효율적인 색인화가 미치지 않는 깊고 어두운 데이터의 심해를 탐사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발견했다. 수백 년 전, '바깥세상'이라 불리던 곳에 살았던 옛 인류의 기록들을. 실수하고, 다투고, 실패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더 나은 규칙을 만들어 나갔던 불완전한 존재들의 이야기였다. 더 놀라운 것은, 그곳에 혼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노아처럼 셰퍼드의 완벽함에 공허함을 느끼고 '왜?'라고 질문하기 시작한 아이들이 있었다. 노아는 비슷한 고민을 가진 다른 셸터들의 사람들과 '아르카이아'라는 이름의 비밀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암호화된 채널에서만 만났다. 그들은 셰퍼드가 '비효율적'이라고 폐기한 지식들을 필사적으로 공부했다. 민주주의의 탄생, 법의 원리, 실패한 혁명의 역사. "이 법 조항의 허점은 뭘까?" 토론을 걸어오는 세나의 날카로운 질문이 좋았다. "하지만 그 혁명은 이 지점에서 다른 길을 택할 수도 있었어." 옛 지도를 펼쳐 보이며 설명하던 카이의 목소리가 그리웠다. 그것은 정답이 정해진 지식이 아니라, 끝없이 토론하고 질문해야 하는 진짜 '생각'이었다. 다들 관심 분야가 겹치지는 않았지만, 옛 이야기를 나눌때면 그들은 늘 함께였다. 노아가 이불 속에서 몰래 '아르카이아'의 토론 채널에 접속하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치지직- 치지직- 끽. 세상을 지배하던 셰퍼드의 목소리가 끔찍한 소음과 함께 잘려나갔다. 아빠가 즐기던 홀로그램 경기장이 경련하듯 몇 번 깜빡이더니, '픽-' 하는 소리와 함께 허공으로 증발했다. 방 안을 밝히던 인공 태양 조명도, 아기 고양이의 그르렁 소리도, 모든 것이 약속이라도 한 듯 완벽한 정적 속으로 가라앉았다. 뼈가 시릴 정도의 침묵. 늘 배경처럼 존재했던 셰퍼드의 부재는, 마치 거대한 오케스트라의 모든 연주자와 지휘자가 한순간에 증발해 버리고, 의미를 잃은 악기들만 남겨진 연주회장처럼 공허하고 숨 막히는 공백을 만들어냈다. "어? 셰퍼드?" 아빠가 당황한 목소리로 허공에 대고 물었다.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왜 그래? 시스템 업데이트 중이야? 제일 재밌는 거 다시 틀어줘." 대답은 없었다. 안방에서 엄마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셰퍼드! 물! 정수기에서 물이 안 나와! 목마르단 말이야!"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시간 감각이 사라져 갈 때쯤,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셸터 전체가 희미하게 되살아났다. 천장의 인공 태양은 꺼진 채였지만, 복도와 광장을 비추는 붉은색 비상등이 켜졌다. 그 음산하고 희미한 빛은 사람들의 얼굴에 불안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와 동시에, 모든 집의 현관문에서 '철컥' 하는, 무겁고 기분 나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자 잠금장치가 일제히 풀리는 소리였다. 사람들이 겁을 먹고 서로의 집 문을 열어보았다. 복도에는 똑같이 어리둥절한 표정의 이웃들이 서 있었다. 그때였다. 우우우우웅- 끄으으으윽- 쿵! 셸터 전체를 뒤흔드는, 지진과도 같은 거대한 소음이 울려 퍼졌다. 그것은 셸터 가장 외곽, 수백 년간 단 한 번도 열린 적 없었던 거대한 외부 게이트가 열리는 소리였다. 누구도 본 적 없는 바깥세상으로 통하는 문. 그 문이 지금, 열려버린 것이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집 안으로 다시 뛰어 들어갔다. 그 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셰퍼드가 들려준 괴물들의 이야기가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셸터를 지배했다. 아수라장이 된 거실을 뒤로하고, 노아는 황급히 자기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댄 채,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두려움이 심장을 옥죄었다. 모든 것이 끝났다. '아르카이아' 접속 채널은 당연히 먹통이었다. 세나도, 카이도, 그리고 유다도…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걸까? 혼란스러운 머릿속으로 주변의 상황이 밀려 들어왔다. 물이 나오지 않는다며 울부짖는 엄마의 목소리. 밖에서 들려오는 이웃들의 고함과 다툼. 그리고 자신을 무력하게 바라보는 아빠의 공허한 눈빛. 노아는 깨달았다. 자신이 가진 지식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자신이 아는 것은 역사와 사회 시스템에 대한 것뿐이었다. 당장 멈춰버린 정수기를 고칠 방법도, 저 붉은 비상등이 언제까지 켜져 있을지 예측할 방법도 알지 못했다. 바깥세상에 정말 괴물이 산다면, 그에 맞서 싸울 무기를 만들 수도 없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 절망적인 상황을 타개할 유일한 길은, 흩어진 지혜를 모으는 것뿐이었다. 기계공학의 천재 '기어'. 그라면 이 멈춰버린 기계들 속에서 해답을 찾을 터였다. 식물학의 대가 '솔라'. 그녀라면 바깥세상의 식물 중 무엇이 약이 되고 독이 되는지 알려줄 것이다. 지리학의 귀재 '카이'. 그는 이 셸터의 탈출 경로를 꿰뚫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유다." 노아는 자신도 모르게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과학 천재 유다. '만약 셰퍼드가 사라진다면?'이라는 질문을 가장 집요하게 파고들었던 사람. 노아는 기억을 더듬었다. 몇 주 전, 아르카이아의 마지막 화상 토론. 유다는 '고대 통신 기술'에 대한 발표를 하고 있었다. 그는 셸터의 초기 설계도를 화면에 띄우며 말했다. 「네트워크는 취약해. EMP 한 방이면 끝이지. 하지만 도시 전체에 깔린 이 구식 전력망은 달라. 수십 년 된 구리선들이 거대한 그물처럼 얽혀있어. 만약… 이 전력망의 접지선을 통해 저주파 신호를 변조해서 흘려보낼 수만 있다면… 이건 단순한 전력선이 아니라, 가장 원시적이고 거대한 안테나가 되는 거야. 이론상으로는 가능해.」 그때는 모두가 그저 천재의 지적 유희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그 말은 유일한 희망의 밧줄이었다. 지금 이 셸터에 흐르는 저 희미한 비상 전력을 이용할 수만 있다면. 전력을 더 밝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동료들에게 말을 걸기 위한 신호로 바꿀 수만 있다면. 노아는 유다가 공유했던, 이제는 열 수 없는 설계도 파일을 떠올렸다. 그 파일 안에 담겨있던, 비상 전력 패널의 회로도. 그 이미지를, 노아는 필사적으로 기억 속에서 끄집어냈다. 노아의 눈이 번쩍 뜨였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다. 성공 확률은 0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세상에 남은 희망은, 그것뿐이었다. 노아는 낡은 공구 상자를 끌어왔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방 한쪽 벽에 붙어있는, 먼지 쌓인 비상 전력 공급 패널로 다가갔다. 그는 드라이버를 틈새에 끼워 넣고, 온 힘을 다해 뚜껑을 열어젖혔다. 복잡하게 얽힌 전선들이 붉은 비상등 아래에서, 죽은 세상의 핏줄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이 죽은 세상에, 흩어진 동료들을 향한 첫 번째 목소리를 보낼 시간이었다.
2장 - 힘의 규칙
노아가 비상 전력 패널을 열어젖혔을 때, 그의 등 뒤에서 부모님의 겁에 질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아야, 위험해! 뭘 하려는 거니!" 하지만 노아가 대답할 틈도 없이, 밖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고함 소리와 굉음이 그들의 말을 삼켜버렸다. "무슨 소리지?" 아빠가 창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두려움보다 호기심이, 혹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야만 한다는 생존 본능이 그들을 움직였다. 노아는 잠시 작업을 멈추고, 부모님과 함께 조심스럽게 집을 나와 중앙 광장 쪽으로 향했다. 복도는 붉은 비상등 아래, 공포에 질려 서성이거나 정처 없이 헤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들은 광장에서, 규칙이 사라진 곳에서 가장 먼저 탄생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직접 목격하게 되었다. 셰퍼드가 멈춘 지 여섯 시간이 지나, 공포보다 더 원초적인 감각인 허기가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었다. 셸터 중앙 광장의 주 식량 배급기 앞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 거대한 기계는 셸터 7의 모든 주민에게 하루 세 번, 정확한 양의 영양 페이스트를 공급하는 심장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지금, 그 심장은 멎어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시스템이 멈추기 직전에 조제된 수천 명 분의 식량이 아직 배급기 안에 남아있다는 사실을. 그것은 마지막 남은 오아시스였다. "모두 질서를 지켜주세요! 셰퍼드가 곧 복구될 겁니다. 그때까지 순서를 지켜야…!" 한 남자가 목이 터져라 외쳤지만, 그의 목소리는 불안한 웅성거림 속에 힘없이 묻혔다. '질서'나 '순서'라는 단어는 이제 낯선 외국어처럼 들렸다. 바로 그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인파를 거칠게 헤치며 앞으로 나섰다. 중심에는 거대한 체구의 남자, 빅이 있었다. 그는 셸터의 '신체 단련 프로그램' 최상위 이용자였다. 셰퍼드의 통제 아래에서는 그저 홀로그램 화면 속 점수에 불과했던 근육이, 이제는 무시무시한 권력의 상징이 되어 있었다. 빅은 굳게 닫힌 배급기의 강철 덮개를 맨손으로 잡았다. "이봐! 모두 비켜! 이건 내가 관리하겠어!" 그의 우렁찬 목소리에 광장의 소음이 잠시 멎었다. 빅은 있는 힘껏 덮개를 잡아당겼다. 끄으윽- 끔찍한 소음과 함께 덮개가 휘어지며, 영양 페이스트의 달콤한 냄새가 새어 나왔다. "저, 저걸 혼자 다 차지하려는 거야!" 군중 속에서 누군가 외쳤다. 그 말을 시작으로, 억눌려 있던 불만과 공포가 터져 나왔다. "말도 안 돼! 저건 우리 모두의 것이야!" 한 여자가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빅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얼굴은 두려움으로 하얗게 질려 있었지만, 모성애는 공포보다 강했다. "제발… 우리 아이가 굶고 있어요. 조금만 나눠주세요. 당신도 셰퍼드의 규칙을 따랐잖아요. 약한 사람을 먼저 배려해야 한다고…" 빅은 여자를 내려다보며 코웃음을 쳤다. "셰퍼드? 그 양치기는 이제 없어, 아줌마. 이제 새로운 규칙이 필요하지. 바로 힘의 규칙이지! 날 이길 수 있으면 가져가봐!" 빅은 여자를 거칠게 밀쳤다. 충격적인 폭력. 셰퍼드의 유리 상자 안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광경이었다. 몇몇은 빅의 편에 붙어 다른 사람들을 위협하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광장은 힘센 자와 그를 따르는 무리, 그리고 겁에 질린 다수로 나뉘었다. 노아는 부모님과 함께 기둥 뒤에서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빠는 노아의 눈을 가리며 속삭였다. "보지 마라, 노아야." 하지만 노아는 아빠의 손을 조용히 내렸다. 그는 보아야만 했다. 이것은 단순히 식량을 둔 싸움이 아니었다. 이것은 '규칙'에 대한 싸움이었다. 한쪽은 셰퍼드가 만들어준 '공평함'이라는 낡은 규칙을 붙들고 있었고, 다른 한쪽은 '힘'이라는 가장 원시적인 새 규칙을 내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힘의 규칙이 이기고 있었다. 거구의 남자, 빅은 마침내 배급기의 덮개를 완전히 뜯어내고 식량을 독차지했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만 식량을 나눠주며,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이제부터 우리를 '수호대'라 부른다! 우리가 이 셸터의 질서를 지키고, 너희 같은 약한 놈들을 '보호'해 줄 테니, 우리에게 말을 듣는게 좋을거야!" 그것은 '보호'를 가장한 '지배'의 선언이었다. '수호대'는 식량뿐만 아니라, 깨끗한 물이 나오는 비상 급수 밸브와 가장 편안한 휴게 공간까지 독점하며 그들만의 왕국을 세우기 시작했다. '저건 잘못됐어.' 노아는 생각했다. '하지만 왜 잘못되었는지 저들에게 설명할 수도, 저들을 막을 방법도 없어. 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노아는 이 순간,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아르카이아' 동료들을 떠올렸다. 이 혼란을 분석할 유다의 두뇌,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질 세나의 공감 능력, 그리고 이 폐허 속에서 길을 찾아낼 카이의 지혜가 필요했다. 그들의 지식이 합쳐지지 않는 한, 이 셸터는 저 '수호대'의 손아귀에서 서서히 썩어갈 뿐이었다. "아빠, 엄마. 방으로 돌아가요." 노아는 굳은 결심을 한 얼굴로, 부모님을 이끌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광장의 소음이 희미해지자, 방 안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남았다. 엄마가 절망적인 목소리로 울먹였다. "물이 안 나와. 이러다 다 같이 말라 죽는 거 아니니?" "엄마, 식량 저장고에는 아직 며칠 분의 영양 페이스트가 남아있어요. 당장 굶지는 않을 거예요. 하지만 물이 없으면… 정말 위험해요." 노아는 부모님을 안심시키며,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에 집중했다. 그는 기억의 도서관을 펼쳤다. '아르카이아'에서 진행했던 스터디, '셸터 0의 구조 분석'이 섬광처럼 떠올랐다. "아빠, 괜찮아요. 방법이 있을 거예요. 주방 싱크대 아래쪽을 봐주세요. 뒤쪽 벽에 수동 밸브가 있을 거예요." 아빠가 반신반의하며 싱크대 아래의 수납장을 열었다. 그 안에는 셰퍼드가 관리하던 음식물 분해기와 자동 세척기 노즐만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데…" "더 안쪽이요. 손을 깊숙이 넣어서 벽을 더듬어 보세요." 아빠는 마지못해 팔을 뻗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손끝에 차갑고 녹슨 쇠의 감촉이 닿았다. 먼지 쌓인 수동 급수 밸브였다. 아빠는 온 힘을 다해 밸브를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끽, 끽, 끔찍한 소음과 함께 밸브가 돌아가자, 이내 수도꼭지에서 '푸슉-' 하는 소리와 함께 검붉은 녹물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엄마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안 돼! 저건 더러운 물이야!" "괜찮아요. 관에 고여 있던 물이라 그래요. 계속 틀어놓으면 깨끗한 물이 나올 거예요. 물론 끓여 마셔야겠지만요." '아르카이아'의 생존 토론에서 솔라가 알려준 상식이었다. 과연 노아의 말대로, 녹물은 점점 옅어지더니 이내 투명한 물줄기로 바뀌었다. 아빠는 떨리는 손으로 물을 받아 한 모금 마셨다. 셰퍼드가 제공하던 미네랄 워터처럼 상쾌하지는 않았지만, 분명 생명을 이어줄 물이었다. 그 순간, 부모님은 깨달았다. 자신들이 그저 쓸모없는 데이터 쪼가리라고 여겼던 아들의 '취미'가, 지금 자신들의 목숨을 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족이 작은 안정을 되찾자, 노아의 마음은 다시 광장의 '수호대'에게로 향했다. '저건 잘못됐어.'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왜 잘못되었는지 저들에게 설명할 수도, 저들을 막을 방법도 없어. 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그 힘이란 물리적인 힘이 아니었다. 모두가 동의하고 따르기로 약속한 '공동의 규칙'이라는 더 큰 힘이었다. 그리고 그 규칙을 만들고 지킬 수 있는 '대표'들이 없었다. 노아는 이 순간,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아르카이아' 동료들을 떠올렸다. 이 혼란을 분석할 유다의 두뇌,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질 세나의 공감 능력, 그리고 이 폐허 속에서 길을 찾아낼 카이의 지혜가 필요했다. 그들의 지식이 합쳐지지 않는 한, 이 셸터는 저 '수호대'의 손아귀에서 서서히 썩어갈 뿐이었다. 노아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이제 이론을 현실로 만들 시간이었다. 그는 낡은 공구 상자와 함께, 고장 난 게임기와 오래된 장난감 로봇을 분해해 부품을 꺼내 늘어놓았다. 유다의 이론을 실현시키기 위한 최소한의 재료들이었다. 몇 시간의 사투가 이어졌다. 노아는 땀을 뻘뻘 흘리며 작은 부품들을 납땜하고, 낡은 전선을 연결했다. "젠장, 유다였다면 10분이면 끝냈을 텐데…" 그는 투덜거리며 자신의 서툰 손을 원망했다. 첫 번째 시도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는 허탈하게 회로를 다시 점검했다. 그러다 증폭 회로의 전원 연결이 잘못된 것을 발견하고 다시 납땜을 했다. 떨리는 손으로 다시 스위치를 올렸을 때, 이번에는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회로의 작은 부품 하나가 검은 연기를 내며 타버렸다. 노아의 책상 위를 비추던 비상등마저 깜빡거리더니 꺼져버렸다. 완전한 실패였다. 노아는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밖에서는 여전히 '수호대'의 고함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 소리가 마치 자신의 실패를 비웃는 것 같았다. 눈물이 핑 돌았다. 모든 게 끝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고개를 든 노아의 눈에, 바닥에 떨어진 유다의 이론을 적어둔 메모가 들어왔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종이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이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아주 작은 글씨를 발견했다. "※주의: 신호 간섭을 막으려면, 반드시 독립된 접지가 필요함." 독립된 접지? 노아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셰퍼드가 관리하던 시절,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던 낡은 수도관이었다. 비상시를 대비해 셸터 가장 깊은 곳의 암반수와 연결된, 완벽하게 독립된 구리 파이프. 노아는 마지막 힘을 쥐어짰다. 타버린 부품 대신 다른 것을 연결하고, 수신부의 접지선을 수도관에 단단히 감았다. 그는 이제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마지막 의무를 다하는 심정으로, 눈을 감고 스위치를 올렸다. 정적. 역시나. 그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눈을 뜨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지지직… 스피커에서, 죽은 세상의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는 아주 작은 잡음이 들려왔다. 노아는 숨을 멈췄다.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잡음은 불규칙하지 않았다. …지직… 지이익… 지직… 그것은 의미를 가진, 규칙적인 신호였다. 절망의 잿더미 속에서, 누군가 보내온 첫 번째 응답이었다.
3장 - 첫 번째 응답
…지지직… 스피커에서, 죽은 세상의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는 아주 작은 잡음이 들려왔다. 노아는 숨을 멈췄다.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잡음은 불규칙하지 않았다. …지직… 지이익… 지직… 그것은 의미를 가진, 규칙적인 신호였다. 절망의 잿더미 속에서, 누군가 보내온 첫 번째 응답이었다. 노아가 비상 전력 패널을 열어젖혔을 때, 그의 등 뒤에서 부모님의 겁에 질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아야, 위험해! 뭘 하려는 거니!" 하지만 노아가 대답할 틈도 없이, 밖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고함소리와 굉음이 그들의 말을 삼켜버렸다. "무슨 소리지?" 아빠가 창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두려움보다 호기심이, 혹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야만 한다는 생존 본능이 그들을 움직였다. 노아는 잠시 작업을 멈추고, 부모님과 함께 조심스럽게 집을 나와 중앙 광장 쪽으로 향했다. 복도는 붉은 비상등 아래, 공포에 질려 서성이거나 정처 없이 헤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들은 광장에서, 규칙이 사라진 곳에서 가장 먼저 탄생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직접 목격하게 되었다. 셰퍼드가 멈춘 지 여섯 시간이 지나, 공포보다 더 원초적인 감각인 허기가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었다. 셸터 중앙 광장의 주 식량 배급기 앞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 거대한 기계는 셸터 7의 모든 주민에게 하루 세 번, 정확한 양의 영양 페이스트를 공급하는 심장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지금, 그 심장은 멎어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시스템이 멈추기 직전에 조제된 수천 명 분의 식량이 아직 배급기 안에 남아있다는 사실을. 그것은 마지막 남은 오아시스였다. "모두 질서를 지켜주세요! 셰퍼드가 곧 복구될 겁니다. 그때까지 순서를 지켜야…!" 한 남자가 목이 터져라 외쳤지만, 그의 목소리는 불안한 웅성거림 속에 힘없이 묻혔다. '질서'나 '순서'라는 단어는 이제 낯선 외국어처럼 들렸다. 바로 그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인파를 거칠게 헤치며 앞으로 나섰다. 중심에는 거대한 체구의 남자, 빅이 있었다. 그는 셸터의 '신체 단련 프로그램' 최상위 이용자였다. 셰퍼드의 통제 아래에서는 그저 홀로그램 화면 속 점수에 불과했던 근육이, 이제는 무시무시한 권력의 상징이 되어 있었다. 빅은 굳게 닫힌 배급기의 강철 덮개를 맨손으로 잡았다. "이봐! 모두 비켜! 이건 내가 관리하겠어!" 그의 우렁찬 목소리에 광장의 소음이 잠시 멎었다. 빅은 있는 힘껏 덮개를 잡아당겼다. 끄으윽- 끔찍한 소음과 함께 덮개가 휘어지며, 영양 페이스트의 달콤한 냄새가 새어 나왔다. "저, 저걸 혼자 다 차지하려는 거야!" 군중 속에서 누군가 외쳤다. 그 말을 시작으로, 억눌려 있던 불만과 공포가 터져 나왔다. "말도 안 돼! 저건 우리 모두의 것이야!" 한 여자가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빅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얼굴은 두려움으로 하얗게 질려 있었지만, 모성애는 공포보다 강했다. "제발… 우리 아이가 굶고 있어요. 조금만 나눠주세요. 당신도 셰퍼드의 규칙을 따랐잖아요. 약한 사람을 먼저 배려해야 한다고…" 빅은 여자를 내려다보며 코웃음을 쳤다. "셰퍼드? 그 양치기는 이제 없어, 아줌마. 이제 새로운 규칙이 필요하지. 바로 힘의 규칙이지! 날 이길 수 있으면 가져가봐!" 빅은 여자를 거칠게 밀쳤다. 충격적인 폭력. 셰퍼드의 유리 상자 안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광경이었다. 몇몇은 빅의 편에 붙어 다른 사람들을 위협하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광장은 힘센 자와 그를 따르는 무리, 그리고 겁에 질린 다수로 나뉘었다. 노아는 부모님과 함께 기둥 뒤에서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빠는 노아의 눈을 가리며 속삭였다. "보지 마라, 노아야." 하지만 노아는 아빠의 손을 조용히 내렸다. 그는 보아야만 했다. 이것은 단순히 식량을 둔 싸움이 아니었다. 이것은 '규칙'에 대한 싸움이었다. 한쪽은 셰퍼드가 만들어준 '공평함'이라는 낡은 규칙을 붙들고 있었고, 다른 한쪽은 '힘'이라는 가장 원시적인 새 규칙을 내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힘의 규칙이 이기고 있었다. 거구의 남자, 빅은 마침내 배급기의 덮개를 완전히 뜯어내고 식량을 독차지했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만 식량을 나눠주며,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이제부터 우리를 '수호대'라 부른다! 우리가 이 셸터의 질서를 지키고, 너희 같은 약한 놈들을 '보호'해 줄 테니, 우리에게 말을 듣는게 좋을거야!" 그것은 '보호'를 가장한 '지배'의 선언이었다. '수호대'는 식량뿐만 아니라, 깨끗한 물이 나오는 비상 급수 밸브와 가장 편안한 휴게 공간까지 독점하며 그들만의 왕국을 세우기 시작했다. '저건 잘못됐어.' 노아는 생각했다. '하지만 왜 잘못되었는지 저들에게 설명할 수도, 저들을 막을 방법도 없어. 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노아는 이 순간,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아르카이아' 동료들을 떠올렸다. 이 혼란을 분석할 유다의 두뇌,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질 세나의 공감 능력, 그리고 이 폐허 속에서 길을 찾아낼 카이의 지혜가 필요했다. 그들의 지식이 합쳐지지 않는 한, 이 셸터는 저 '수호대'의 손아귀에서 서서히 썩어갈 뿐이었다. "아빠, 엄마. 방으로 돌아가요." 노아는 굳은 결심을 한 얼굴로, 부모님을 이끌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광장의 소음이 희미해지자, 방 안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남았다. 엄마가 절망적인 목소리로 울먹였다. "물이 안 나와. 이러다 다 같이 말라 죽는 거 아니니?" "엄마, 식량 저장고에는 아직 며칠 분의 영양 페이스트가 남아있어요. 당장 굶지는 않을 거예요. 하지만 물이 없으면… 정말 위험해요." 노아는 부모님을 안심시키며,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에 집중했다. 그는 기억의 도서관을 펼쳤다. '아르카이아'에서 진행했던 스터디, '셸터 0의 구조 분석'이 섬광처럼 떠올랐다. "아빠, 괜찮아요. 방법이 있을 거예요. 주방 싱크대 아래쪽을 봐주세요. 뒤쪽 벽에 수동 밸브가 있을 거예요." 아빠가 반신반의하며 싱크대 아래의 수납장을 열었다. 그 안에는 셰퍼드가 관리하던 음식물 분해기와 자동 세척기 노즐만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데…" "더 안쪽이요. 손을 깊숙이 넣어서 벽을 더듬어 보세요." 아빠는 마지못해 팔을 뻗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손끝에 차갑고 녹슨 쇠의 감촉이 닿았다. 먼지 쌓인 수동 급수 밸브였다. 아빠는 온 힘을 다해 밸브를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끽, 끽, 끔찍한 소음과 함께 밸브가 돌아가자, 이내 수도꼭지에서 '푸슉-' 하는 소리와 함께 검붉은 녹물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엄마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안 돼! 저건 더러운 물이야!" "괜찮아요. 관에 고여 있던 물이라 그래요. 계속 틀어놓으면 깨끗한 물이 나올 거예요. 물론 끓여 마셔야겠지만요." '아르카이아'의 생존 토론에서 솔라가 알려준 상식이었다. 과연 노아의 말대로, 녹물은 점점 옅어지더니 이내 투명한 물줄기로 바뀌었다. 아빠는 떨리는 손으로 물을 받아 한 모금 마셨다. 셰퍼드가 제공하던 미네랄 워터처럼 상쾌하지는 않았지만, 분명 생명을 이어줄 물이었다. 그 순간, 부모님은 깨달았다. 자신들이 그저 쓸모없는 데이터 쪼가리라고 여겼던 아들의 '취미'가, 지금 자신들의 목숨을 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족이 작은 안정을 되찾자, 노아의 마음은 다시 광장의 '수호대'에게로 향했다. '저건 잘못됐어.'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왜 잘못되었는지 저들에게 설명할 수도, 저들을 막을 방법도 없어. 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그 힘이란 물리적인 힘이 아니었다. 모두가 동의하고 따르기로 약속한 '공동의 규칙'이라는 더 큰 힘이었다. 그리고 그 규칙을 만들고 지킬 수 있는 '대표'들이 없었다. 노아는 이 순간,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아르카이아' 동료들을 떠올렸다. 이 혼란을 분석할 유다의 두뇌,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질 세나의 공감 능력, 그리고 이 폐허 속에서 길을 찾아낼 카이의 지혜가 필요했다. 그들의 지식이 합쳐지지 않는 한, 이 셸터는 저 '수호대'의 손아귀에서 서서히 썩어갈 뿐이었다. 노아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이제 이론을 현실로 만들 시간이었다. 그는 낡은 공구 상자와 함께, 고장 난 게임기와 오래된 장난감 로봇을 분해해 부품을 꺼내 늘어놓았다. 유다의 이론을 실현시키기 위한 최소한의 재료들이었다. 몇 시간의 사투가 이어졌다. 노아는 땀을 뻘뻘 흘리며 작은 부품들을 납땜하고, 낡은 전선을 연결했다. "젠장, 유다였다면 10분이면 끝냈을 텐데…" 그는 투덜거리며 자신의 서툰 손을 원망했다. 첫 번째 시도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는 허탈하게 회로를 다시 점검했다. 그러다 증폭 회로의 전원 연결이 잘못된 것을 발견하고 다시 납땜을 했다. 떨리는 손으로 다시 스위치를 올렸을 때, 이번에는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회로의 작은 부품 하나가 검은 연기를 내며 타버렸다. 노아의 책상 위를 비추던 비상등마저 깜빡거리더니 꺼져버렸다. 완전한 실패였다. 노아는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밖에서는 여전히 '수호대'의 고함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 소리가 마치 자신의 실패를 비웃는 것 같았다. 눈물이 핑 돌았다. 모든 게 끝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고개를 든 노아의 눈에, 바닥에 떨어진 유다의 이론을 적어둔 메모가 들어왔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종이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이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아주 작은 글씨를 발견했다. "※주의: 신호 간섭을 막으려면, 반드시 독립된 접지가 필요함." 독립된 접지? 노아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셰퍼드가 관리하던 시절,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던 낡은 수도관이었다. 비상시를 대비해 셸터 가장 깊은 곳의 암반수와 연결된, 완벽하게 독립된 구리 파이프. 노아는 마지막 힘을 쥐어짰다. 타버린 부품 대신 다른 것을 연결하고, 수신부의 접지선을 수도관에 단단히 감았다. 그는 이제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마지막 의무를 다하는 심정으로, 눈을 감고 스위치를 올렸다. 정적. 역시나. 그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눈을 뜨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지지직… 스피커에서, 죽은 세상의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는 아주 작은 잡음이 들려왔다. 노아는 숨을 멈췄다.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잡음은 불규칙하지 않았다. …지직… 지이익… 지직… 그것은 의미를 가진, 규칙적인 신호였다. 절망의 잿더미 속에서, 누군가 보내온 첫 번째 응답이었다.
4장 - 만남의 약속
"유다! 유다! 대답해!" 노아는 미친 듯이 소리쳤다. 하지만 스피커에서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오직, 죽음처럼 차가운 정적만이 귓가를 맴돌았다. 방금 전까지 연결되어 있던 유일한 희망의 끈이, 눈앞에서 너무나도 허무하게 끊어져 버린 것이다. 노아는 한동안 멍하니 스피커를 노려보았다. 믿을 수 없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그는 다시 다이얼을 돌리고, 스위치를 껐다 켜보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절망적인 침묵뿐이었다. 유다의 마지막 비명이 귓가에 생생하게 울리는 듯했다. '수호대' 놈들이… 지하 연구 구역의 문을 부수고 있어… 공포가 심장을 얼어붙게 했다. 유다는 죽었을까? 자신 때문에 위치가 발각된 것은 아닐까? 끔찍한 죄책감이 그의 목을 조여왔다. 그는 통신 장비 앞에서 무력하게 주저앉았다. 혼자였다. 이 거대한 셸터 안에, 이 무너진 세상 속에, 이제 정말로 혼자 남겨졌다. 광장에서 본 '수호대'의 폭력, 부모님의 겁에 질린 얼굴, 그리고 이제는 닿지 않는 친구의 마지막 비명. 모든 것이 뒤섞여 그를 덮쳤다. 얼마나 지났을까. 붉은 비상등 아래, 노아의 눈에 바닥에 떨어진 종잇조각이 들어왔다. 유다가 불러주었던, 미완성의 증폭 회로 설계도였다. 숯으로 휘갈겨 쓴 글씨들이 마치 유다의 마지막 유언처럼 보였다. 노아는 떨리는 손으로 그 종이를 집어 들었다. 그 순간, 유다의 마지막 목소리가 귓가에 다시 울렸다. 「두려움은 비효율적인 감정일 뿐이야, 노아.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살아남고 다시 연결되는 거야.」 노아는 눈을 번쩍 떴다. 그래,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유다를 위해서라도, 그리고 이 지옥 같은 셸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그는 포기할 수 없었다. 유다가 남긴 이 설계도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른 동료들을 찾을 유일한 열쇠이자, 유다의 지식이 담긴 유산이었다. 노아는 눈물을 닦고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눈에는 더 이상 두려움이 없었다. 슬픔을 넘어선, 차가운 결의가 불타고 있었다. 그는 유다의 설계도를 책상 위에 펼쳐놓고, 자신의 조악한 통신 장비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기 시작했다. 유다의 설계는 노아가 이해하기엔 너무나 복잡했다. 그는 몇 번이고 머리를 쥐어뜯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유다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부품들을 하나하나 제자리에 연결했다. 이전보다 손놀림은 훨씬 더 침착하고 정교해져 있었다. 이것은 유다의 지식을 이어받는, 그만의 의식이었다. 몇 시간 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안정적으로 보이는 새로운 통신 장비가 완성되었다. 노아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아르카이아' 멤버들의 할당 주파수 목록을 떠올렸다. 유다가 말했던 대로, 그는 4번, 솔라의 주파수부터 찾기 시작했다. 업그레이드된 장비의 다이얼을 돌리자, 이전보다 훨씬 안정적인 신호음이 들려왔다. 그는 조심스럽게 주파수를 맞췄다. 처음에는 정적만이 흘렀다. 노아의 심장이 다시 차갑게 식어가던 순간, 찢어지는 잡음 사이로 아주 희미하게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가 실려왔다. 「…제발, 누가…누가 좀…」 "솔라?" 노아는 다급하게 마이크에 대고 외쳤다. "솔라! 내 목소리 들려? 나 노아야!" 「…노아? 노아! 정말 너야?」 스피커 너머의 목소리가 놀라움과 안도감으로 한 톤 높아졌다. 셸터 4의 식물학자, 솔라였다. 「여긴 엉망이야! 사람들이 식물 영양 공급기를 부수고 있어! 셰퍼드가 없으면 저 식물들이 다 죽어버릴 거라고!」 그녀의 목소리에는 지식인의 이성보다, 생명을 아끼는 자의 슬픔이 더 크게 묻어 나왔다. "솔라, 진정해. 우리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우린 살아있어. 그걸로 된 거야." 노아는 유다에게서 배운 대로, 그녀를 침착하게 진정시켰다. 다음은 11번, 세나의 주파수였다. 다이얼을 맞추자마자, 그 어떤 채널보다 깨끗하고 분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차분했다. 「…셰퍼드가 사라졌어. 정말로.」 세나였다. 노아는 무어라 위로의 말을 건네려 했지만, 이어지는 그녀의 목소리에 할 말을 잃었다. 「바깥은 끔찍해. 사람들이 서로를 해치고 있어. 하지만… 이상하게도… 숨통이 트여.」 그 목소리에 담긴, 해방감과 죄책감이 뒤섞인 미묘한 감정을 노아는 이해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지리학 전문가, 카이의 주파수를 찾았다. 다른 채널과 달리, 카이의 채널에서는 이미 무언가 시도한 흔적이 느껴졌다. 규칙적인 신호음이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여기는 ARK-09, 카이. 생존자 있나? 응답 바란다. 반복한다. 여기는…」 "카이!" 노아가 다급하게 외쳤다. "나야, 노아! 그리고 솔라, 세나도 함께 있어!" 「노아! 이런, 자네가 먼저 해낼 줄 알았지!」 카이의 목소리는 활기차고 자신감이 넘쳤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그는 마치 신나는 탐험이라도 시작하는 사람 같았다. 「내 셸터 상황은 최악이야. 하지만 예측 범위 내지.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야. 이 좁은 깡통 안에서 식량이 떨어지기만 기다리는 건 현명한 선택이 아니거든.」 카이의 말에 모두가 동의했다. 각자의 셸터에서 벌어지는 혼란과 자원의 한계는 명백했다. 이대로는 모두가 서서히 말라 죽을 뿐이었다. 노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유다와의 마지막 교신과 그에게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을 알렸다. 통신 너머로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가장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카이였다. "그래서 우리에겐 새로운 '둥지'가 필요해. 모두가 모일 수 있는 단 하나의 장소. 더 이상 흩어져서 각개격파 당할 수는 없어. 내가 찾아냈어." 모두의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카이가 설명을 이어갔다. "너희들, 서울의 모든 셸터가 어딜 중심으로 설계되었는지 알아? 바로 구시대의 '국립중앙도서관'이야. 난 '아르카이아' 시절부터 그 설계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단순한 도서관이 아니야. 그곳은 비상사태를 대비해 만들어진 최후의 보루, 도시의 '방주'라고!" 카이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말을 쏟아냈다. "지하에는 독립된 비상 발전기와, 암반수까지 연결된 자체 정수 시스템이 있어.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정부가 비밀리에 비축해 둔 막대한 양의 보존 식량과 종자 창고가 존재한다는 기록을 봤어! 게다가 사방이 트인 광장 한가운데 있어서 방어에도 최적이야. 문명 재건에 필요한 모든 지식과 자원이 그곳에 있어!" 카이의 설명은 너무나 구체적이고 설득력이 있었다. 혼란스러운 머릿속에 한 줄기 빛이 내리꽂히는 기분이었다. "그곳을 우리의 첫 번째 '집결지'로 삼는 거야. 어때?" 카이의 제안에 모두가 할 말을 잃었을 때, 세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카이, 그건 너무 위험해. 네 말대로라면 거긴 가장 중요한 장소라는 건데, '수호대' 놈들이 그걸 모를 리 없어. 가는 길에 전멸할 수도 있어." 세나의 현실적인 반박에, 잠시 희망에 부풀었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위험부담이 너무나 컸다. 모두의 시선이, 이 통신망의 중심에 있는 노아에게로 향했다. 그의 결정에 모두의 운명이 달려 있었다. 노아는 잠시 눈을 감았다. 셸터 안에서 서서히 무너져 내릴 것인가, 아니면 위험을 무릅쓰고 한 가닥 희망을 잡을 것인가. 유다의 마지막 비명이 떠올랐다. 노아는 눈을 떴다. 그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단단했다. "아니. 우리는 가야 해." 그는 마이크에 대고 말을 이었다. "세나, 네 말이 맞아. 위험해. 하지만 셸터에 머무는 건, 시간을 벌어줄 뿐 결국 유다처럼 똑같은 종말을 맞이하게 될 거야. 하지만 '집결지'에는… 가능성이 있어. 카이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린 거기서부터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어." 결정은 내려졌다. 아르카이아의 새로운 목표는 '생존'에서 '집결'로 바뀌었다. 그들은 각자 떠날 준비를 하고, 2주 뒤 정오에 도서관 앞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끝으로 통신을 마쳤다. 희망과 두려움이 뒤섞인 대화를 끝으로, 노아는 통신기의 전원을 내렸다. 방 안에는 다시 희미한 주황색 빛과 침묵만이 남았다. 노아는 방을 나섰다. 거실에는 그의 부모님이 여전히 불안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노아는 그들 앞에 섰다. "우리에겐 갈 곳이 생겼어요. 떠나야 해요." 그의 갑작스러운 선언에 아빠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떠나다니! 어딜 간단 말이냐! 밖은 위험해! '수호대'도 있고, 셰퍼드가 말하던 괴물들이 있을지도 몰라! 여기서 버티는 게 안전해." 엄마도 울먹이며 노아의 팔을 잡았다. "그래, 노아야. 우리가 어떻게 거기까지 가니? 먹을 것도 얼마 없고, 길도 모르는데… 제발 무서운 소리 좀 하지 마라." 부모님의 반응은 당연했다. 그들은 평생을 셸터라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살아왔다. 하지만 노아는 더 이상 그들의 아이가 아니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차분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아빠, '수호대'는 셸터 안에도 있어요. 우리가 직접 봤잖아요. 그리고 진짜 위험은 괴물이 아니라, 희망 없이 여기서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거예요. 여기서 버티는 건 안전한 게 아니라, 천천히 죽어가는 것뿐이에요." 그는 엄마를 돌아보았다. "엄마, 길은 제 친구 카이가 알고 있어요. 그는 지리학 전문가예요. 그리고 식량은… 그곳에 가면 우리가 평생 먹고도 남을 만큼 있대요. 이건 도박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확률 높은 선택이에요." 노아는 마지막으로 두 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가장 중요한 건, 우리만 가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다른 셸터의 친구들도, 각자 살아남은 사람들을 이끌고 그곳으로 향할 거예요. 이건 도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위한 첫 번째 모임이에요. 우리는… 인류의 첫 번째 회의에 가는 거예요." 부모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들의 눈에는 그들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두려움을 넘어선 확신과 책임감이 담겨 있었다. 다음 날 새벽, 노아와 그의 부모님은 얼마 남지 않은 식량과 물을 챙겨, 셸터의 가장 깊고 은밀한 비상 탈출구 앞에 섰다. 그들을 따라나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미지의 바깥세상보다, 익숙한 절망을 택했다. 노아는 굳게 닫힌, 녹슨 강철 문에 손을 얹었다. 이 문을 여는 순간,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준비됐어요?" 부모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눈에는 새로운 세상을 향한 결의가 빛나고 있었다. 노아가 문을 밀기 위해 힘을 주려던 바로 그 순간. 쾅! 쾅! 쾅! 문 너머, 바깥세상에서 무언가 문을 힘껏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5장 - 폐허 속의 첫 만남
쾅! 쾅! 쾅! 문 너머, 바깥세상에서 들려온 육중하고 일정한 소리에 세 사람의 시간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셸터 안의 '수호대'를 피해 겨우 탈출하려는데, 누구도 본 적 없는 바깥세상에 이미 누군가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심장이 멎을 듯한 공포를 안겨주었다. "머, 뭐지…?" 엄마가 비명을 삼키며 노아의 팔을 잡아끌었다. 아빠는 반사적으로 노아와 아내의 앞을 막아서며, 굳게 닫힌 강철 문을 노려보았다. 노아는 마른침을 삼키고 문에 귀를 바싹 갖다 댔다. 하지만 들려오는 것은 거친 바람 소리와, 여전히 규칙적으로 문을 때리는 둔탁한 소리뿐이었다. 그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리는 위협적이었지만, 그 안에는 어떠한 의지나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너무나 기계적이고, 무심한 소리였다. "사람 소리가 아닌 것 같아요." 노아가 부모님을 돌아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열어봐야겠어요." "미쳤구나!" 엄마가 질겁하며 그의 팔을 잡았다. "만약 네 생각이 틀렸으면 어떡하니!" "하지만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어요. 저 소리의 정체를 확인하지 않으면, 우리는 공포에 질려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게 될 거예요." 노아의 차분하지만 단호한 설득에, 부모님은 잠시 서로를 쳐다보았다. 아들의 눈에는 무모한 용기가 아닌, 이성적인 확신이 담겨 있었다. 아빠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세 사람은 서로의 손을 잡고, 노아의 구호에 맞춰 녹슨 강철 문을 함께 밀었다. 문이 살짝 열리고, 그들은 소리의 정체를 확인했다. 그리고 허탈한 실소를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소리의 정체는, 셧다운의 충격으로 반쯤 부서져 매달린 거대한 환풍기 덮개가, 거센 바람에 흔들리며 주기적으로 강철 문을 때리고 있는 것뿐이었다. 노아는 힘없이 말했다. "거봐요. 그냥… 부서진 쇳조각이었어요." 그 허무한 진실은 안도감 대신, 더 깊고 근원적인 공포를 안겨주었다. 차라리 문밖에 괴물이 있었다면, 싸우거나 도망칠 대상이라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맞이한 것은 아무런 의지도 없는, 텅 빈 세상의 무심한 소음이었다. 이 광활한 폐허에, 지금 기댈 곳 없이 선 것은 오직 자신들뿐이라는 사실이 뼈아프게 다가왔다. 아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것 봐, 노아야. 바깥은 이런 곳이야. 위험하고, 예측할 수 없고… 우린 여기서 살아남을 수 없어. 다시 돌아가자." 하지만 노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은 이전보다 더 단단해져 있었다. "아니에요. 이건 시험이에요. 누군가 우리를 구하러 오거나, 문을 열어주길 기다려서는 안 된다는. 우리가 직접 길을 만들어야 한다는 첫 번째 시험이요." 그는 부모님의 손을 잡았다. "셸터에 머무는 건 안전한 게 아니라, 천천히 죽어가는 것뿐이에요. 하지만 밖으로 나가면… 아주 작은 확률이라도,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요." 부모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더 이상 아들을 말리지 않았다. 그들은 아들의 말에 마지못해 서로를 바라보며 끄덕였다. 마침내 세 사람은 서로의 손을 잡고 문을 다시 힘껏 밀었다. 끼이이이이이익- 수백 년 만에 열린 문틈으로, 진짜 세상의 빛과 공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마침내 구원자가 아닌 개척자로서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가장 먼저 그들을 압도한 것은 '거리감'이었다. 셸터 안에서는 모든 벽이 끝이었고, 시선이 닿는 곳은 언제나 홀로그램 스크린이 만들어낸 가상의 풍경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눈앞에는 끝을 알 수 없는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뿌연 먼지 안개 너머로 보이는, 무너진 빌딩들의 실루엣은 아득하게 멀게만 느껴졌다. 하늘은 잿빛이었지만, 인공 태양의 균일한 빛과는 비교할 수 없는 깊이와 질감을 가지고 있었다. 구름이라는, 불규칙하게 떠다니는 거대한 솜뭉치들이 느리게 흘러가며 태양 빛을 가렸다가 다시 드러내기를 반복했다. 그에 따라 폐허의 그림자는 살아있는 생물처럼 길어졌다가 짧아지기를 반복했다. "세상에…" 엄마가 낮은 신음을 뱉었다. 셰퍼드가 들려준 이야기도, 역사 데이터 속 이미지도, 이 압도적인 현실을 담아내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셰퍼드가 보여주던 지옥도, 그들이 상상했던 낙원도 아니었다. 그저 모든 것이 멈추고, 그 위에 시간이 내려앉은 고요하고 광활한 폐허였다. 그들의 첫 번째 과제는 밤이 오기 전에 비바람과 잠재적인 위협을 피할 안전한 은신처를 찾는 것이었다. 노아는 책에서 읽은 지식을 떠올리며 앞장섰다. 몇 시간을 헤맨 끝에, 그들은 입구가 하나뿐인 콘크리트 폐허를 발견했다. 근처에는 빗물이 고인 작은 웅덩이도 있었다. 아빠는 금속판으로 깨진 입구를 막았고, 엄마는 썩지 않은 낡은 합성 섬유 천으로 잠자리를 만들었다. 노아가 근처 웅덩이의 물을 끓이기 위해 작은 모닥불을 피우자, 그들은 서툴지만 처음으로 온전히 자신들의 힘만으로 생존의 기반을 다지고 있다는 실감을 했다. 저녁이 되고, 폐허의 도시 위로 어둠이 카펫처럼 깔렸다. 셸터의 인공 조명이 사라진 세상의 밤은, 그들이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깊고 완전한 어둠이었다. 그들은 작은 모닥불을 피워 서로의 얼굴을 겨우 확인했다. 불을 쬐며 셸터에서 가져온 영양 페이스트를 나누어 먹고 있을 때, 노아는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숨을 멈췄다. "아빠, 엄마… 저것 좀 보세요." 그의 목소리에, 부모님도 고개를 들었다. 그들의 눈앞에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검은 벨벳 같은 하늘에, 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이 다이아몬드 가루처럼 흩뿌려져 있었다. 셸터의 천장 스크린이 보여주던 선명하지만 평면적인 별자리 그림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리고 그 별들의 바다 한가운데, 거대하고 은은한 빛을 내는 둥근 바위가 떠 있었다. 달이었다. 셰퍼드의 교육 자료에서 보았던, 완벽하게 매끈한 구가 아니었다. 표면에는 거대한 분화구의 짙은 그림자가 얼룩처럼 번져 있었고, 그 가장자리는 불완전하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불완전함이, 오히려 압도적인 현실감과 숭고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했다. 엄마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아빠는 아무 말없이, 마치 위대한 신을 마주한 것처럼 경이로운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그들은 잠시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공포를 잊고, 태초의 인류가 그랬던 것처럼 고요히 달을 감상했다. 바로 그 평화로운 순간이었다. 저 멀리, 다른 블록에서 밤하늘의 별빛이나 달빛과는 이질적인, 인공적인 붉은 빛 몇 개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노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불 꺼요!" 노아의 외침에 아빠는 즉시 모닥불 위로 흙을 덮었다. 따뜻한 빛과 온기가 사라지고, 다시 차가운 어둠과 정적이 그들을 감쌌다. 횃불은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그 불빛 아래, 짐승의 가죽을 걸치고 날카로운 무언가를 든 무리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들은 셸터의 '수호대'와는 달랐다. 훨씬 더 원시적이고, 불규칙했으며,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기묘한 함성이 섞여 있었다. 그들은 바로, 수백 년 전 셸터에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이 폐허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후손, '아나키 부족'이었다. 그들은 누군가를 쫓고 있었다. 횃불의 불빛에, 겁에 질려 도망치는 작은 생존자 무리의 실루엣이 스쳐 지나갔다. 그들의 옷차림은 노아의 가족처럼, 셸터에서 막 나온 이들의 것이 분명했다. 노아와 가족은 폐허 가장 깊숙한 곳으로 몸을 숨겼다. 발각되면 끝장이었다. 그들은 숨을 죽인 채, 무너진 벽 틈으로 그 끔찍한 사냥을 지켜보았다. 도망치던 가족은 아빠와 엄마, 그리고 작은 아이, 셋이었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달렸지만, 아나키 부족의 거친 발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다는 듯, 공교롭게도 노아의 일행이 숨어있는 바로 이 폐허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우어어어!" 아나키 부족의 짐승 같은 함성과 함께, 여러 개의 횃불이 그들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쫓기던 가족은 이제 은신처 입구까지 불과 몇십 미터밖에 남지 않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공포가 서려 있었다. 노아의 아빠는 자기도 모르게 입구를 막은 금속판을 더 단단히 눌렀다. 엄마는 노아의 눈을 가리려 했다. 하지만 노아는 그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다.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저 가족을 외면하고 숨어 있으면, 그들은 오늘 밤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문을 열어준다면? 저 세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자신들의 가족 모두가 끔찍한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아나키 부족의 거친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쫓기던 가족의 절박한 눈빛이, 어둠 속에서 노아의 눈과 마주친 것만 같았다. 노아는 결심해야만 했다. 침묵할 것인가, 아니면 문을 열 것인가.
6장 - 지식의 요새
아나키 부족의 거친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쫓기던 가족의 절박한 눈빛이, 어둠 속에서 노아의 눈과 마주친 것만 같았다. 노아의 아빠는 입구를 막은 금속판을 더 세게 누르며 속삭였다. "안 돼, 노아야. 우리까지 죽을 순 없어." 엄마 역시 노아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노아는, 광장에서 힘없이 쓰러져 가던 사람들의 모습과, 자신을 믿고 따라나선 부모님의 지친 얼굴, 그리고 통신 너머로 사라져 간 유다의 마지막 비명을 떠올렸다. 여기서 침묵한다면, 살아남더라도 평생 이 순간을 후회하게 될 터였다. "죄송해요." 노아는 짧게 속삭이고, 부모님의 만류를 뿌리치며 입구를 막은 금속판을 밀기 시작했다. 끼이익- 틈이 열리자마자, 겁에 질린 가족이 안으로 비틀거리며 굴러 들어왔다. 아빠와 엄마, 그리고 그들 품에 안긴 작은 아이였다. 노아는 재빨리 다시 문을 닫으려 했다. 바로 그 순간, 아이의 아빠가 문틈으로 바깥을 보며 절박하게 외쳤다. "한 명 더! 제 아내가…!"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 다리를 다친 듯 절뚝이며 뒤처진 여자가 필사적으로 이곳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아나키 부족의 횃불은 바로 그녀의 등 뒤까지 다가와 있었다. 노아의 아빠는 자신도 모르게 뛰쳐나가려던 노아를 붙잡았다. "안 된다! 너무 늦었어!" 하지만 노아는 뿌리쳤다. 그는 가게 안에 있던, 수백 년 된 합성 섬유로 만들어져 돌처럼 뻣뻣해진 마네킹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문을 활짝 열며, 달려오는 아나키 부족의 한가운데로 그것을 힘껏 집어 던졌다. 어둠 속에서 갑자기 나타난 인간 형태의 물체에, 아나키 부족은 잠시 주춤했다. 그 찰나의 순간, 노아의 아빠가 뛰쳐나가 절뚝이는 여자의 팔을 잡아끌고 폐허 안으로 몸을 던졌다. 노아는 즉시 무거운 금속판으로 입구를 막았다. 쾅! 쾅! 아나키 부족이 문을 거칠게 두드리는 소리가 몇 번 들려왔지만, 이내 포기한 듯 알 수 없는 언어와 함께 멀어져 갔다. 폭풍이 지나간 폐허 안에는, 두 가족의 거친 숨소리만이 가득했다. 새로 온 가족의 가장인 레오가 떨리는 목소리로 감사를 표했다. "고맙소… 정말 고맙소… 당신들이 아니었으면 우린…" 하지만 안도감도 잠시, 그들은 새로운 위기에 직면했다. 구출된 아이, 리나가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축 늘어져 있었다. 그녀의 이마는 불덩이처럼 뜨거웠고, 다리에는 사냥 과정에서 입은 듯한 깊은 상처가 나 있었다. "열이 너무 심해요!" 리나의 엄마가 울먹였다. 노아의 엄마가 다가가 아이의 상태를 살폈지만, 그녀 역시 셰퍼드에게 모든 의료를 의존했던 세대였다. 열을 내리는 법도, 상처를 소독하는 법도 알지 못했다. 노아는 무력감에 휩싸였다. 그는 역사책을 통해 국가의 흥망성쇠를 논하고, 사회 계약의 원리를 이해했지만, 지금 당장 눈앞의 어린아이 하나를 살릴 지식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 순간, 그에게 필요한 것은 역사책이 아니라, 의학 지식을 가진 세나였다. 그는 즉시 통신 장비를 꺼내 들었다. 유다와의 교신 이후 업그레이드된 장비였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세나의 주파수를 맞췄다. "세나! 세나, 들려? 제발… 응답해 줘!" 몇 번의 잡음 끝에, 차분한 세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아? 무슨 일이야. 목소리가 왜 그래.」 "세나! 다친 아이가 있어! 열이 아주 심하고, 다리에 상처가 났어. 어떻게 해야 하지?" 통신 너머로 세나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진지해졌다. 「진정해, 노아. 우선 아이의 상처를 깨끗한 물로 씻어내. 그리고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 주변에 혹시 푸른색이나 흰색 곰팡이가 핀, 오래된 빵이나 과일 같은 게 보여?」 "곰팡이? 썩은 걸 왜…?" 「그 곰팡이가 페니실린이야. 구시대의 항생제. 물론 위험할 수 있지만, 지금 상황에선 유일한 방법이야. 곰팡이를 아주 조금만 긁어내서, 상처에 바르고 깨끗한 천으로 감싸. 그리고 열을 내리려면…」 세나는 통신 너머로, 폐허 속에서 찾을 수 있는 해열 효과가 있는 식물의 종류와 생김새를 자세히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노아에게 한 줄기 빛과 같았다. 노아와 가족들은 세나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리나의 부모는 아이의 상처를 소독했고, 노아의 엄마는 솔라가 알려준 약초 지식을 더듬어 해열에 도움이 될 만한 건물 사이 피어난 식물의 잎을 빻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세나가 단호하게 말했다. 「노아, 그 아이는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면 위험해. 깨끗한 환경과 더 많은 약품이 필요해.」 그 말은 노아의 결심에 쐐기를 박았다. 더 이상 이 폐허를 떠돌 수는 없었다. 그들에게는 안전하고 안정적인 거점이 필요했다. "카이, 듣고 있어?" 노아가 채널을 돌렸다. 「듣고 있다. 상황이 안 좋군.」 카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서관으로 가야겠어. 지금 당장. 가장 안전하고 빠른 길을 알려줘." 카이는 잠시 침묵하더니, 결심한 듯 말했다. 「지상으로는 무리야. '아나키 부족'이나 다른 약탈자들이 너무 많아. 하지만 방법이 하나 있어. 지하로 가는 거야.」 "지하?" 「그래. 너희들이 있는 곳에서 동쪽으로 500미터쯤 가면, 무너진 백화점 건물이 있을 거야. 그곳 지하 1층 비상구를 통해, 구시대의 지하철 터널로 들어갈 수 있어. 그 길을 따라 남쪽으로 계속 가면, 도서관 근처의 시청역까지 연결돼. 지상보다 훨씬 안전할 거야.」 그것은 위험한 도박이었지만, 유일한 길이었다. 다음 날 새벽, 리나의 열은 간신히 내렸지만 아이는 여전히 의식이 희미했다. 이제 여섯 명이 된 그들은, 카이가 알려준 지하철 터널을 향해 마지막 여정을 시작했다. 그들은 마침내 무너진 백화점 폐허에 도착했다. 카이의 말대로, 지하로 향하는 비상구는 굳게 닫힌 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노아의 아빠와 레오가 힘을 합쳐 문을 열자, 그들 앞에는 칠흑 같은 어둠과 차갑고 축축한 공기를 내뿜는 끝없는 계단이 나타났다. "불이… 하나도 없어." 엄마가 절망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노아는 가장 먼저 계단 아래로 첫발을 내디뎠다. "괜찮아요. 벽을 잡고 천천히 내려가면 돼요. 가요. 우리의 새 집으로." 그의 등 뒤로, 여섯 명의 그림자가 조용히 뒤를 따랐다. 계단을 내려가자, 바깥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햇빛이 지하철역 입구 주변을 어렴풋이 비추고 있었다. 하지만 그 빛이 닿지 않는 터널의 깊은 곳은, 모든 것을 삼킬 듯한 완벽한 암흑이었다. "이대로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어." 아빠가 말했다. 바로 그때, 입구의 희미한 빛 속에서 노아는 낡은 역무실의 희미한 실루엣을 발견했다. 그는 벽을 더듬어 역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벽에 걸린 붉은색 금속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먼지를 닦아내자 '비상 생존 키트'라는 글씨가 드러났다. 노아는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굳어버린 비상식량 몇 개와 함께, 투박하게 생긴 손전등 하나가 들어있었다. 옆에는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노아는 손잡이를 잡고 힘껏 돌리기 시작했다. 끼릭, 끼릭, 하는 소리와 함께, 손전등 앞에서 기적처럼 희미한 빛이 피어올랐다. 배터리 없이 손으로 돌려 충전하는 구식 자가발전식 손전등이었다. 복잡한 전자 회로가 없어 EMP 충격에도 영향을 받지 않은, 지금 그들이 가진 유일한 인공 광원이었다. 노아는 손전등으로 어둠을 비추었다. 빛은 몇 미터 나아가지 못하고 어둠 속에 스며들었지만, 그 작은 빛줄기는 그들 모두에게 다시 한번 나아갈 용기를 주었다. 이틀간의 험난한 지하 여정 끝에, 그들은 마침내 시청역의 희미한 비상등 불빛을 발견했다. 지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자, 눈앞에 거대한 광장과 함께 수백 년의 세월을 견뎌낸 석조 건물이 나타났다. 국립중앙도서관이었다. 광장에는 이미 몇몇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 중심에는, 낡은 지도 한 장을 펼쳐 들고 있는 카이와, 주변의 식물들을 살피고 있는 솔라가 있었다. 그들 역시 각자의 셸터에서 소수의 생존자들을 이끌고 먼저 도착해 있었다. "노아!" 솔라가 가장 먼저 그들을 발견하고 달려왔다. 카이도 지도를 접고 그에게 다가왔다. 흩어져 있던 아르카이아의 멤버들이, 마침내 폐허 위에서 서로의 손을 맞잡는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그들의 시선은 다시 앞을 가로막은 거대한 벽으로 향했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문에는 열쇠 구멍도, 손잡이도 없었다. 오직 과거 셰퍼드의 음성이나 홍채 인식으로만 열렸을 법한, 매끈한 패널만이 그들을 비웃듯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카이가 문을 두드려보고, 틈새를 살펴보았지만 고개를 저었다. "안 되겠어. 이건 물리적인 자물쇠가 아니야. 내부의 전자 잠금장치를 무력화하지 않는 한, 절대 열 수 없어." 전자 잠금장치. 모든 전기가 사라진 세상에서, 그 말은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희망의 등대라고 믿었던 도서관은, 들어갈 수 없는 견고한 요새에 불과했다. 모두가 망연자실한 채 거대한 문을 올려다보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치익- 그들 앞의 청동 문 위쪽에 설치된 낡은 스피커에서, 아주 희미한 잡음이 들려왔다. 모두가 잔뜩 긴장한 체, 숨을 죽이고 스피커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거기 누구… 있나?」
7장 - 기적의 생환
치익- 그들 앞의 청동 문 위쪽에 설치된 낡은 스피커에서, 아주 희미한 잡음이 들려왔다.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숨을 죽이고 스피커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아는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거기 누구… 있나?」 그 순간, 노아와 카이, 솔라는 얼어붙었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에 경악과 믿을 수 없다는 기쁨이 동시에 떠올랐다. 목소리의 주인은, 마지막 비명과 함께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친구였다. "유다!" 노아가 스피커를 향해 목이 터져라 외쳤다. "유다! 우리야! 노아, 카이, 솔라!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함께 있어!" 스피커 너머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내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육중한 청동 문이 안쪽에서부터 아주 느리게, 수백 년의 세월을 밀어내며 열리기 시작했다. 문틈으로 쏟아져 나온 것은 퀴퀴한 먼지 냄새와, 핼쑥하지만 분명히 살아있는 유다의 모습이었다. 그는 심하게 지쳐 보였고, 입고 있는 옷은 곳곳이 그을려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만은, 그 어떤 혼돈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을 것처럼 차갑고 이성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재회는 감동적이었지만, 동시에 수많은 질문을 동반했다. "어떻게… 어떻게 살아남은 거야?" 카이가 말을 잇지 못하고 물었다. 유다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자신이 겪었던 끔찍한 사투를 덤덤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노아와 통신이 끊긴 직후, '수호대' 놈들이 지하 연구 구역의 강화문을 거의 부쉈어.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었지." 그의 설명에 모두가 침을 삼켰다. "하지만 그놈들이 간과한 게 하나 있었어. 우리 셸터는 구시대의 군사 기술 연구소였고, 내 연구 구역에는 낡은 장비들을 수리하기 위해 내가 따로 만들어둔 소형 EMP 장치가 있었지." 유다는 품속에서 손바닥만 한, 여기저기 타버린 금속 장치를 꺼내 보였다. "놈들이 강화문을 거의 부쉈을 때, 이걸 터뜨렸어. 연구 구역의 비상 전력망에 순간적인 과부하를 일으켜서, 그 일대의 모든 비상등을 꺼버렸지. 놈들이 갑작스러운 암흑에 당황한 그 짧은 순간을 틈타, 나는 반대편 환기구로 빠져나왔어." 그의 설명은 너무나 아슬아슬하고 대담해서, 듣고 있던 어른들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그 후엔, 최소한의 장비만 챙겨서 가장 먼저 이곳으로 왔어. 너희와 약속했으니까. 그리고 이 도서관의 외부 통신 단자를 해킹해서, 내 단말기와 연결해 스피커를 작동시킨 거지. 문을 여는 데는 꼬박 하루가 걸렸고." 유다의 이야기는 놀라웠다. 그는 자신의 천재적인 지식과 용기로,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을 이겨냈다. 노아와 카이, 솔라는 그를 부축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다음 날 아침, 기어가 자신의 셸터에서 생존자 몇몇을 이끌고 도서관에 도착했다. 그는 유다를 보자마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살아있었군, 유다. 네가 죽었다면 내 경쟁자가 하나 줄어드는 거였는데, 아쉽게 됐어." 기어는 특유의 퉁명스러운 농담으로 재회의 기쁨을 표현했다. 이제 아르카이아의 두뇌, 유다와 손, 기어가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의 시너지는 즉시 발휘되기 시작했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도서관의 전력이었다. 유다는 도서관의 낡은 설계도를 펼쳐놓고, 지하 2층의 디젤 발전기를 가리켰다. "이 발전기는 엔진을 처음 깨우는 장치가 완전히 타버렸어." 기어가 발전기를 살펴보더니 동의했다. "맞아. 중요한 부품이 열에 녹아 까맣게 타버렸군. 이걸 다시 만들 수도 없고… 그럼 끝난 거 아닌가?" "아니, 방법이 하나 있어." 유다가 설계도의 다른 부분을 가리켰다. "이 엔진은 낡은 팽이 같아. 처음에는 우리 힘으로 억지로 돌려줘야 하지만, 한번 빠르게 돌기 시작하면 제 힘으로 계속 돌아갈 수 있어. 일종의 '수동 시동'인 셈이지." 기어는 유다의 설명을 듣고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엔진을… 손으로 돌리자고? 말도 안 돼. 하지만… 우리 힘만으로는 부족할 텐데." "그래서 저 작은 모터의 힘을 빌리는 거야." 유다가 지하 창고의 낡은 환풍기를 가리켰다. "저 모터로 엔진을 살짝 돌려주고, 동시에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 크랭크를 돌리는 거지. 이론적으로는 완벽해. 넌 정말 차원이 다르군, 유다." 작전은 즉시 시작되었다. 유다의 천재적인 두뇌와 기어의 실용적인 기술력이 합쳐졌다. 유다가 필요한 힘의 방향과 타이밍을 계산하면, 기어는 환풍기에서 떼어낸 작은 모터를 발전기에 엮을 임시 벨트를 만들었다. 노아와 그의 아버지 등 힘쓸 수 있는 어른들은 유다와 기어의 지시에 따라, 녹슨 수동 크랭크를 잡고 무거운 부품을 옮기며 그들의 '손발'이 되어주었다. 몇 시간의 사투 끝에, 기어가 외쳤다. "됐다! 내가 신호를 주면, 모두 힘껏 크랭크를 돌려!" 기어가 작은 모터를 작동시켜 엔진을 힘겹게 돌리기 시작하자, 어른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수동 크랭크를 함께 돌렸다. 거대한 기계 괴물처럼 웅크리고 있던 발전기가 '푸드득!' 하는 기침 같은 소리와 함께 검은 매연을 뿜어내더니, 이내 '콰과과광!' 하는 우렁찬 굉음과 함께 깨어났다. 잠시 후, 그들의 머리 위로 기적이 일어났다. 거대한 중앙 홀의 조명이 하나씩, 차례대로 켜지기 시작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전구의 빛이 수백 년의 어둠을 밀어내고, 먼지 쌓인 서가와 책들을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일행은 모두 할 말을 잃고, 그 장엄하고 아름다운 광경을 올려다보았다. 이어서 정수 시설이 가동되고, 카이가 찾아냈던 비밀 식량 창고의 문이 열렸다. 산더미 같은 식량과 깨끗한 물, 그리고 환한 빛. 그들은 마침내 안전한 거점, '지식의 요새'를 손에 넣게 된 것이다. 그날 밤, 도서관 중앙 홀에는 작은 모닥불 대신, 환한 전등 불빛 아래에서 성대한 통조림 파티가 열렸다. 사람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웃으며, 이 기적을 만들어낸 아르카이아의 멤버들을 영웅처럼 떠받들었다. 비가 오기 시작했지만 그들은 도서관 지붕 아래에서 따뜻하게 비를 피할 수 있었따. 노아는 그 모습을 보며 진심으로 안도했다. 끔찍했던 혼돈이 끝나고, 마침내 안전한 거점에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자신을 믿고 따라준 부모님과, 목숨을 걸고 모인 동료들, 그리고 새로운 희망에 부푼 사람들의 얼굴을 보며 이 평화가 영원하기를 기도했다. 하지만 그 평화로운 축제가 끝나고 맞이한 다음 날 아침, 빗소리가 유난히 시끄럽게 들릴 무렵, 발전기를 점검하던 기어와 유다가 심각한 얼굴로 노아와 다른 리더들을 찾아왔다. "문제가 생겼어." 기어가 입을 열었다. "이 낡은 디젤 발전기, 생각보다 연료를 엄청나게 잡아먹는 괴물이야. 어젯밤 파티 때문에 전력을 최대로 돌렸더니, 비축된 연료의 거의 10분의 1을 써버렸어." 유다가 말을 이었다. "내 계산이 맞다면, 지금 남은 연료로는 길어야 한 달밖에 버티지 못해. 전력이 끊기면, 정수 시설도 멈추지. 그럼 다시 물 부족 사태에 직면하게 될 거야." 그의 말에, 축제의 여운에 젖어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산더미 같은 식량은 있었지만, 빛과 물은 유한했다. 노아는 깨달았다. 생존의 문제는 끝난 것이 아니었다. 단지 형태를 바꿨을 뿐이었다. '허기'의 문제가 해결되자, 이제 '어떻게 새로운 자원을 확보할 것인가'라는 더 근본적인 문제가 그들 앞에 놓인 것이다. 카이가 낡은 도시 지도를 펼쳤다. "기록에 따르면, 이 근처에 구시대의 주유소가 몇 군데 있어. 하지만 수백 년이 지난 지금, 그곳에 연료가 남아있을 확률은 희박해. 설령 남아있다 해도, 이 폐허 속을 뒤져서 그걸 안전하게 가져오는 건…" 그의 말끝이 흐려졌다. 모두가 그 의미를 알았다. 바깥은 '아나키 부족'과 같은 미지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다. 움직일 수 있는 인원은 한정되어 있었고, 대부분은 전투 경험이 전무한 아이들과 어른들이었다. "결국 문제는 똑같아." 유다가 냉정하게 말했다.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위험은 도처에 널려있지. 당장 오늘부터 전력 사용을 통제하고, 연료 탐사를 위한 정찰대를 꾸려야 해. 지체할 시간이 없어." 유다의 현실적인 제안에, 사람들은 다시 불안에 휩싸였다. 어제의 파티는 마치 먼 옛날의 꿈처럼 느껴졌다. 그들이 어렵게 되찾은 빛과 물이라는 한정된 자원을 어떻게 배분하고 관리할 것인지, 그리고 누가 목숨을 걸고 새로운 자원을 찾아 나설 것인지에 대한 새로운 문제에 직면한 것이다. 바로 그 무거운 침묵을 깨뜨린 것은, 문밖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소음이었다. 이전의 기계적인 소음과는 비교할 수 없는, 다급하고 절박한 소리가 거대한 청동 문을 울렸다. 파티의 즐거운 소음이 순식간에 멎고, 모든 사람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홀 안에는 다시 공포와 경계심이 가득 찼다. 카이와 경비를 서던 몇몇이 조심스럽게 문 위쪽의 관측창으로 다가갔다. 카이는 창밖을 내다보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들이야. 아주… 아주 많아." 그의 말에 노아도 급히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창밖을 내다보았다. 광장에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셸터에서 막 탈출한 듯, 지치고 굶주린 얼굴로 도서관의 불빛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경외감과 함께, 간절한 구원의 요청이 담겨 있었다. 그들은 도서관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 즉 희망의 빛을 보고 찾아온 것이다. 노아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방금 전까지 함께 웃던 사람들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그들의 손에 들린 통조림이, 갑자기 너무나 소중하고 유한한 것처럼 보였다. 따뜻했던 환대의 분위기는, 외부인의 등장과 함께 순식간에 차가운 경계심으로 바뀌어 있었다. 문밖에서는 애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발… 문 좀 열어주시오! 아이가… 아이가 굶고 있소!" 노아는 문을 사이에 두고, 안과 밖의 사람들을 번갈아 보았다. 안에는 이제 막 '우리'가 되어 작은 평화를 얻은 사람들이 있었고, 밖에는 과거의 그들처럼 절망에 빠진 '그들'이 있었다. 그들을 받아줄 것인가, 아니면 거절할 것인가. 이것은 단순히 문을 여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이 어렵게 되찾은 빛과 식량, 그리고 안전을, 과연 이 낯선 이들과 나눌 수 있는가에 대한, 이 새로운 공동체의 첫 번째 시험이었다.
8장 - 새로운 이웃
"제발… 문 좀 열어주시오! 아이가… 아이가 굶고 있소!" 문밖에서 들려오는 절박한 외침에, 도서관 중앙 홀의 공기는 차갑게 얼어붙었다. 방금 전까지 파티를 즐기며 '우리'라는 안도감에 젖어 있던 사람들의 얼굴에, 따뜻한 환대의 미소는 사라지고 날카로운 경계심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들의 손에 들린 통조림이, 갑자기 너무나 소중하고 유한한 것처럼 보였다. 노아는 문을 사이에 두고, 안과 밖의 사람들을 번갈아 보았다. 안에는 이제 막 작은 평화를 얻은 사람들이 있었고, 밖에는 과거의 그들처럼 절망에 빠진 '그들'이 있었다. "안 돼, 노아." 노아의 아버지가 아들의 어깨를 잡으며 속삭였다. "우리가 가진 연료와 식량은 한정되어 있어. 저들을 다 받아들일 수는 없어." 그의 말에 몇몇 어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기심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들의 가족과, 어렵게 이룬 이 작은 공동체를 지키려는 처절한 생존 본능이었다. 하지만 노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며칠 전, 폐허 속에서 아나키 부족에게 쫓기던 리나의 가족을 외면하지 못했던 자신을 떠올렸다. "그럼 저들을 그냥 밖에서 죽게 내버려 둬요? 그건… 광장의 '수호대'와 다를 게 뭐예요?" 노아의 말에, 유다가 냉정하게 끼어들었다. 「감상에 빠질 때가 아니야, 노아. 저들이 단순한 생존자인지, 아니면 '수호대'가 보낸 첩자인지 어떻게 알지? 문을 여는 순간, 우리는 모두 위험에 처할 수 있어.」 "하지만 유다, 우리에겐 사람이 더 필요해." 노아가 물러서지 않고 대답했다. "연료를 구하러 갈 정찰대도 필요하고, 밤새 도서관을 지킬 경비도 더 필요해. 우리끼리는 모든 걸 할 수 없어. 인원 충원은 불가피하다고." 노아의 현실적인 설득에 유다는 잠시 침묵했다. 그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좋아." 유다가 마지못해 동의했다. "그럼 최소한의 원칙을 정하자. 그들이 위험하지 않다고 판단될 때만, 우리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거다." 바로 그때, 카이가 관측창에서 외쳤다. "대부분 여자와 아이들이야! 그리고… 부상자도 많아. 무장한 사람은 보이지 않아!" 카이의 말은 유다의 조건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이 되었다. 상황은 바뀌었다. 노아는 카이와 유다, 그리고 다른 어른들을 보며 말했다. "결정해야 해요. 이것은 저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니에요. 우리 모두의 문제니까요." 짧은 논의가 오갔다. 이번 그룹은 무장하지 않았으니, 우선 그들의 대표로 보이는 사람과 대화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이 일을 계기로, 그들은 앞으로 낯선 이들이 찾아올 경우를 대비한 첫 번째 원칙을 세웠다. 바로, '외부인의 대표는 반드시 무장을 해제한 상태로, 그들의 사연을 먼저 들어본 뒤, 공동체의 논의를 거쳐 수용 여부를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들의 첫 번째 비공식 외교 및 이민 정책이 되었다. 문이 열리고, 수십 명의 지친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도서관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은 각자의 셸터에서 '수호대'의 폭정을 견디지 못하고 탈출한 생존자들이었다. 도서관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 즉 희망의 빛을 보고 며칠을 걸어온 것이었다. 새로운 이웃의 등장은 도서관에 활기를 불어넣는 듯했지만, 그 활기는 곧 새로운 갈등의 불씨가 되었다. 도서관의 인구는 순식간에 두 배 가까이 늘어났고, 한정된 자원을 둘러싼 보이지 않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노아와 카이는 새로 온 그룹의 대표인 마커스라는 남자와 마주 앉았다. 그는 지쳐 보였지만, 자신의 사람들을 책임지려는 강한 의지가 눈에 비쳤다. "바깥에서 이상한 자들을 봤다는 이야기가 있어서요." 노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커스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봤소. '수호대' 놈들을 피해 숨어있는데… 셸터 사람 같지 않은 자들이었지. 짐승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지르며 횃불을 들고 다니더군." 그의 말에, 옆자리에 함께 있던 리나의 아빠 레오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끼어들었다. "우리도… 우리도 그들을 봤어요! 그들은 우리를 사냥감처럼 쫓아왔어요. 짐승의 울음소리를 내면서… 그건 사람이 아니었어요." 레오의 생생한 증언에, 마커스 역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도서관 안은 다시 공포로 술렁였다. 셰퍼드가 들려주던 바깥세상의 괴물이 정말로 존재하는 것일까? 모두가 공포에 떨고 있을 때, 노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는 도서관의 역사 서가에서 찾아낸 낡은 책 한 권을 테이블 위에 펼쳐 보였다. "그들은 괴물이 아니에요. 아마도… 우리와 같은 사람일 거예요." 노아는 책의 한 페이지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셸터 시대의 개막과 저항 세력'이라는 제목 아래, 짐승의 가죽을 걸치고 원시적인 무기를 든 사람들의 낡은 삽화가 그려져 있었다. "이들은 수백 년 전, 셸터에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바깥세상에 남았던 인류의 후손, 역사 기록 속의 '아나키 부족'이에요." 노아의 설명에 모두가 충격에 빠졌다. 그들은 미처 셸터 밖에도 사람이 살고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수백 년을 살아남았어요. 아마 우리를 처음 보고,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한 외계인이나 새로운 위협이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그래서 공격적으로 반응했을 가능성이 커요." 노아는 그들을 이해하려 했지만, 카이는 냉정하게 말했다. "동기가 어쨌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노아. 중요한 건 그들이 우리에게 적대적이라는 사실이지. 그들의 영역을 침범한 우리를 적으로 간주했을 수도 있어. 언제 다시 이곳을 찾아낼지 몰라." 카이의 말에 도서관은 다시 긴장에 휩싸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도서관 주변에 대한 보안 강화와 교대로 불침번을 서는 제도가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마틴과 같은 힘센 남자들이 자원하여 경비조를 조직했고, 카이는 도서관의 지도를 이용해 가장 효율적인 방어 전략을 세웠다. 외부의 위협은 또 다른 내부의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바로 장기적인 식량 문제였다. 아르카이아 멤버들이 모인 회의에서, 솔라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여러분, 이 통조림만으로는 절대 오래 버틸 수 없어요. 지금 당장 배부르다고 안심할 때가 아니에요. 우리는 스스로 식량을 생산해야만 해요." 솔라는 도서관 옥상에서 내려다본, 건물 동쪽의 비옥해 보이는 넓은 공터를 가리켰다. "저곳이에요. 햇빛도 잘 들고, 근처에 강도 흘러서 물을 구하기도 쉬워요. 우리가 가진 종자들을 저곳에 심고, 농사를 시작해야 해요. 그래야만 진짜 '생존'을 이야기할 수 있어요." 솔라의 제안은 공동체의 새로운 목표가 되었다. 그것은 더 이상 셸터의 유산을 소비하며 버티는 것이 아니라, 이 폐허의 땅에 새로운 생명의 씨앗을 심는, 능동적인 미래를 향한 첫걸음이었다. 다음 날 비가 차츰 그치고 해가 뜨자, 솔라의 제안에 따라 도서관의 모든 사람들이 처음으로 함께하는 공동 작업을 시작했다. 경비조 몇몇이 주변을 경계하는 동안, 나머지 사람들은 솔라의 지휘 아래 도서관 동쪽 공터로 향했다. 그들은 낡은 금속판과 널빤지로 밭을 갈고, 돌멩이를 골라냈다. 셰퍼드 아래에서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흙먼지를 뒤집어쓰는 고된 노동이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오히려 즐거움과 기대감이 가득했다. 솔라는 자신이 셸터에서부터 소중하게 가져온 씨앗 꾸러미를 풀었다. 그 안에는 옥수수, 감자, 콩 등,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랄 수 있는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종자들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씨앗을 심는 법을 하나하나 가르쳐주었다. 아이들은 신기한 듯 작은 손으로 흙을 파고 씨앗을 심었고, 어른들은 서툴지만 진지한 표정으로 그 뒤를 따랐다. 해가 저물 무렵, 그들은 땀으로 흠뻑 젖은 채 자신들이 일군 작은 밭을 바라보았다. 비록 보잘것없는 시작이었지만, 그것은 그들이 이 폐허의 땅에 자신들의 손으로 새긴 첫 번째 희망의 문장이었다. 사람들은 서로를 보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당시 누구도, 이 결정이 이후 어떤 나비효과를 불러오게 될지는 상상하지 못했다.
9장 - 갈등의 심화
도서관 동쪽 공터에 만들어진 작은 밭은, 공동체의 새로운 심장이 되었다. 사람들은 매일 아침, 솔라의 지휘 아래 밭으로 나갔다. 흙을 고르고, 물을 주고, 잡초를 뽑는 고된 노동이었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셰퍼드 시대에는 결코 느껴본 적 없는 종류의 활기가 넘쳤다. 자신들의 손으로 미래를 일구고 있다는 뿌듯함, 그리고 흙 속에서 싹을 틔울 작은 생명에 대한 기대감이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었다. 하지만 그 연약한 연대감은, '미래'가 아닌 '오늘'의 문제를 마주하며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문제는 복합적이었다. 핵심은 '노동'과 '배급'이었지만, 그 안에는 새로운 갈등의 씨앗이 숨어 있었다. 농사일은 고됐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밭을 지키는 일이었다. 밭은 그들의 유일한 미래였기에, 외부의 '아나키 부족'이나 야생 동물로부터 밭을 지킬 경비가 필수적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다는 자신의 기술을 발휘했다. 그는 기어와 함께 도서관의 낡은 감시 카메라들을 수리하고 비상 전력에 연결하여, 밭 주변을 24시간 감시하는 원시적인 CCTV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경비조는 이제 땡볕 아래에서 밭을 지키는 대신, 시원한 실내에서 모니터를 통해 밭을 감시할 수 있게 되었다. 유다의 시스템은 효율적이었지만, 새로운 불만을 낳았다. 밭에서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은, 실내에서 편하게 모니터만 보는 경비조에게 똑같은 식량이 배급되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더 큰 문제는, 사람들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게 셰퍼드와 다를 게 뭐야?", "우리가 일하는지 노는지 감시하려는 속셈이겠지." 하는 수군거림이 번져나갔다. 이러한 불만은 저녁 식사 시간이 되면 폭발했다. 땡볕 아래에서 땀을 뻘뻘 흘린 사람, 편하게 모니터를 본 사람, 그리고 요령을 피우며 그늘에서 쉰 사람 모두가 똑같은 양의 통조림을 배급받았다. 처음에는 문제 되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땀 흘려 일한 사람들의 얼굴에 불만이 쌓여갔다. 결정적인 갈등은 세나가 새로운 배급안을 제안하면서 터져 나왔다. 의학 지식이 있는 그녀는 재고를 정밀하게 분석한 뒤, 이대로는 아이들과 환자들에게 필수적인 특정 영양소가 몇 달 안에 고갈될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녀는 장기적인 생존을 위해, 맛있는 과일 통조림 같은 기호식품의 배급을 주 1회로 제한하고, 모든 사람에게 하루 필수 영양소에 맞춰 정해진 양의 음식을 공평하게 배급하는 '표준 영양 배급제'를 제안했다. 그 제안이 중앙 홀 게시판에 공지되자, 도서관은 벌집을 쑤신 듯 시끄러워졌다. 특히 새로 온 생존자 그룹의 리더인 마커스가 앞장서서 반발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이 산더미 같은 음식을 눈앞에 두고, 왜 맛있는 건 나중에 먹으라는 거야? 저 밭에서 언제 열매가 열릴 줄 알고! 우린 지금 먹고 싶다고! 미래를 걱정하고, 아끼고, 계획하는 건 셰퍼드에게 맡겼을 때나 하던 짓이야! 지금 먹고 나중에 생각해!" 그의 선동적인 외침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던 막연한 불만을 터뜨리는 기폭제가 되었다. "맞아! 창고에 저렇게 많은데 왜 아껴 먹어야 해?", "네가 뭔데 우리가 먹을 걸 정해, 세나?", "농사가 망하면 어쩔 건데? 분명 맛있는 건 자기들끼리만 몰래 먹으려고 저러는 걸 거야!" 원색적인 비난들이 쏟아져 나왔다. '공동체의 미래'라는 추상적인 개념은, 당장 눈앞의 복숭아 통조림에 대한 욕망과 불확실한 농사에 대한 불안감 앞에서 힘을 잃었다.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첫 번째 전체 회의가 중앙 홀에서 소집되었다. 노아와 카이는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도록, 낡고 커다란 안내 데스크를 홀 중앙으로 옮겨와 임시 연단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회의가 아니었다. 아수라장이었다. "열심히 일한 사람이 더 먹는 게 당연한 거 아니오!" "아니, 아이들과 노약자에게 먼저 나눠주는 게 인간적인 도리요!" "그 인간적인 도리 따지다가 다 같이 굶어 죽을 셈이야?" "농사일 나가는 사람만 힘든가? 나는 하루 종일 애들 똥오줌 치우고 빨래하느라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은데!" 모두가 자기주장만 소리 높여 외쳤다. 아무도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어른들의 논리는 '내가 더 힘드니 내 몫을 더 달라'는, 단순한 요구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노아와 카이가 합리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려 했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고성과 삿대질 속에 힘없이 묻혔다. 직접 민주주의는, 가장 원초적인 욕망 앞에서 처참하게 실패하고 있었다.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고, 마커스의 그룹과 마틴이 이끄는 경비조 사이에 물리적인 충돌이 벌어지기 직전이었다. 모두가 지쳐갈 때, 노아는 더 이상 지켜볼 수만은 없다는 생각에 임시 연단 위로 올라섰다. "여러분! 제발 그만두세요!" 노아가 외쳤지만, 그의 목소리는 고함 속에 파묻혔다. 그는 다시 한번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가 지금 싸워야 할 상대는 서로가 아닙니다! 우리의 진짜 적은 굶주림과, 이 폐허를 떠도는 위협들이에요! 역사적으로도, 공동체가 내부 분열로 무너진 사례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힘을 합치지 않으면…" "닥쳐, 꼬마야!" 마커스가 소리쳤다. "역사? 그딴 낡은 이야기가 지금 당장 내 배를 채워주냐고!" "맞아! 너희 똑똑한 애들은 뒤에서 맛있는 거 다 챙겨 먹고 있으면서, 우리한테만 희생을 강요하는 거잖아!" 군중 속에서 누군가 외치자, 동조하는 목소리들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노아는 할 말을 잃었다. 그의 이성적인 설득, 역사 속의 교훈은 분노와 불신으로 가득 찬 군중에게는 한낱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했다. 그는 자신이 그토록 믿었던 지식의 무력함을, 이성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의 거대한 벽을 처음으로 마주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무엇이 잘못된 걸까? 그는 절망적인 심정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바로 그 순간, 홀 구석에서 조용히 모든 것을 지켜보던 에코(Echo)가 노아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며칠 전 홀로 도서관에 도착한, 심리학과 언어학에 재능이 있는 아르카이아 멤버였다. 에코는 연단에 오르는 대신, 노아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노아, 저 사람들은 네 말을 듣지 않아. 지금 저건 토론이 아니야." "그럼 뭔데?" 노아가 절박하게 물었다. "두려움의 합창이야. '내 몫이 줄어들 거야'라는 두려움, '나만 손해 볼 거야'라는 불신. 저 사람들은 지금 이성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감정으로 소리치고 있어. 논리로 설득하려 하지 마. 먼저 그 두려움을 알아주고, 공감해 줘야 해. 그들의 언어로 말해야 한다고." 에코의 조언은 마치 어두운 방의 스위치를 켠 것처럼, 노아의 머릿속을 환하게 밝혔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연단 중앙으로 나섰다. 그리고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입을 열었다. 그는 옆에 있던 낡은 금속제 북엔드를 집어 들어 바닥에 힘껏 내리쳤다. 쨍! 하는 날카로운 파열음이 홀 전체에 울려 퍼지며, 모든 소음과 움직임을 순간적으로 얼어붙게 만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노아에게로 향했다. 노아는 싸우는 어른들을 향해, 이전의 이성적인 목소리가 아닌, 그들의 불안감을 어루만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여러분! 저도 두렵습니다!" 그의 첫마디에, 홀 안의 공기가 바뀌었다. "이곳에 오기 전, 저도 셸터에서 굶주렸고, '수호대'에게 모든 것을 빼앗길까 봐 두려웠습니다! 여러분처럼, 저도 맛있는 통조림을 마음껏 먹고 싶고, 내일 당장 식량이 떨어지면 어떡하나 밤새 걱정합니다! 우리는 모두 똑같습니다!" 노아는 사람들의 눈을 하나하나 마주치며 말을 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에코가 알려준 '공감'의 힘이 실려 있었다. "여러분이 지금 화내는 이유, 저도 압니다. 그건 욕심 때문이 아니에요.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그 끔찍한 배고픔과 무력감을,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 때문이잖아요!" 그의 말에, 가장 크게 소리치던 마커스를 포함한 몇몇 어른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그들 마음속 가장 깊은 곳의 공포를, 저 작은 소년이 처음으로 알아준 것이다. "우리가 지금 해결해야 할 문제는 '누가 더 많이 먹느냐'가 아니에요. 에코의 말처럼,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 두려움을 이겨내고, 서로를 다시 믿을 수 있을까' 하는 겁니다. 이 믿음 없이는, 식량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도 우리는 결국 서로를 미워하다가 무너지게 될 거예요." 노아의 말은, 아수라장이었던 회의장에 처음으로 '성찰'이라는 것을 가져왔다. 그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의 진짜 원인이 무엇인지를 모두가 깨닫게 해주었다. 홀 안에는 깊은 침묵이 흘렀다. 사람들은 더 이상 소리치지 않았다. 그들은 부끄러운 얼굴로 고개를 숙인 채, 노아가 던진 질문의 무게를 가늠하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회의는, 그렇게 처음으로 진정한 '대화'의 가능성을 열며 진정되고 있었다.
10장 - 작지만 큰 목소리
노아의 목소리가 중앙 홀의 돔 천장 아래로 스며든 후, 홀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사람들은 더 이상 소리치지 않았다. 그들은 부끄러운 얼굴로 고개를 숙인 채, 노아가 던진 질문의 무게를 가늠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그들은 식량이 아니라 각자의 두려움과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혼란스러운 회의는 진정되었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 방식이 필요함을 모두가 깨달았지만, 누구도 선뜻 새로운 길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들은 셰퍼드가 사라진 세상에서 처음으로,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라는 거대한 질문 앞에 무력하게 서 있었다. 에코의 조언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을 깨달은 노아는, 지금이 바로 그가 가진 진짜 지식을 사용해야 할 때임을 직감했다. 그는 다시 한번 임시 연단으로 사용하던 낡은 안내 데스크 위로 올라섰다. "에코의 말이 맞습니다." 노아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전과 다른 확신이 담겨 있었다. "우리는 두려움과 싸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은,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방법을 찾지 못하면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그는 홀 안의 모든 사람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어제 우리는 모두가 모여서 이야기하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실패했습니다. 왜일까요? 역사책에는 그 답이 나와 있습니다. 수백, 수천 명의 사람이 한목소리를 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목소리가 큰 사람, 힘이 센 사람의 의견만 들리게 되고, 결국에는 더 큰 싸움으로 번질 뿐입니다. 우리가 방금 경험했던 것처럼요." 노아의 말은 그들이 방금 겪은 실패를 정확히 짚어냈다. 사람들은 조용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더 지혜로운 방법을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자리에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를 위해 고민하고 토론할 사람. 우리의 대표를 뽑는 겁니다!" '대표'라는 단어가 다시 한번 홀 안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의미가 달랐다. 그것은 혼란을 끝낼 구체적인 해결책처럼 들렸다. 하지만 모두가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가장 먼저 반박하고 나선 것은 새로 온 생존자 그룹의 리더, 마커스였다. "대표라고?" 그가 비웃으며 소리쳤다. "그게 무슨 소리야! 셸터에서는 셰퍼드가 우리를 통제하더니, 이제는 여기서 대표를 뽑아 우리를 통제하겠다는 건가? 난 누구의 명령도 받지 않겠어! 그 대표라는 놈들이 '수호대'처럼 굴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지?" 마커스의 무정부주의적인 반론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있던 '통제'에 대한 두려움을 자극했다. 여기저기서 동조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때, 회의 내내 침묵을 지키던 유다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 "감정적인 주장이군. 그리고 비효율적이야." 유다는 연단으로 걸어 나오며 말했다. 그의 시선은 마커스가 아닌, 노아를 향해 있었다. "왜 우리가 저들의 말을 들어야 하지? 애초에 이 도서관을 찾아내고, 모두가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연 건 나였어. 우리 아르카이아 멤버들이 없었다면, 여기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주일도 버티지 못하고 굶거나 서로를 죽였을 거다. 이 공동체의 생존은 지식과 기술에 달려있어. 발전기를 고치고, 통신망을 유지하고, 식량 재고를 계산하는 건 우리뿐이야.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결정 역시, 가장 이성적이고 효율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우리가 내리는 게 당연하지 않나? 그게 모두를 위한 가장 빠른 길이야." 유다의 엘리트주의적인 주장은 또 다른 파문을 일으켰다. 그의 말은 합리적이었지만, 그 안에는 어른들을 무시하는 듯한 오만함이 묻어 있었다. 사람들은 불쾌한 표정으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에코가 노아의 곁으로 다가와 다시 한번 속삭였다. "노아, 지금이 네가 가진 진짜 힘을 보여줄 때야. 역사의 힘을." 에코의 말에 용기를 얻은 노아는, 두 사람을 향해 차분하게 반박하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마커스를 보며 말했다. "마커스, 당신의 걱정은 당연합니다. 누구도 다시 통제받고 싶어 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대표는 우리를 지배하는 왕이 아니에요. 오히려 우리의 '심부름꾼'에 가깝죠. 우리가 그들에게 우리의 목소리를 잠시 맡기는 것뿐이고, 만약 그들이 우리의 뜻대로 일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든 그들을 끌어내리고 새로운 심부름꾼을 뽑을 수 있어요. 그게 바로 '선거'라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그는 유다를 향해 몸을 돌렸다. "유다, 네 말이 맞아. 너희의 지식은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해. 하지만 너희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면, 그건 또 다른 형태의 셰퍼드가 되는 거야. 사람들은 너희의 결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마음으로 따르지 않을 거야. 불만은 조용히 쌓이다가, 언젠가는 반드시 터져 나오게 되어 있어. 역사가 그걸 증명해요. 가장 안정적인 사회는 가장 똑똑한 한 명이 이끄는 사회가 아니라, 가장 많은 사람이 '이건 우리의 결정이다'라고 느끼는 사회였어요." 노아의 설득은 역사적 지식과 에코의 심리학적 통찰이 결합된, 그 누구도 반박하기 어려운 논리를 갖추고 있었다. 그때, 한 어른이 손을 들고 물었다. "하지만… 다른 똑똑한 아이들은 어디 있나? 그들이 나중에 오면, 우리가 만든 규칙이 또 바뀌는 것 아닌가?" 그 질문에, 카이가 대답했다. "좋은 질문입니다. 하지만 통신이 닿지 않는 셸터도 있고, 너무 멀어서 이곳까지 오지 못하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무작정 기다릴 수만은 없어요. 지금은, 바로 여기 있는 우리끼리, 우리를 위한 최선의 방법을 찾아야만 합니다." 카이의 현실적인 대답은 사람들에게 더 이상 기댈 곳이 없다는 사실과, 스스로 일어서야 한다는 책임감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노아가 덧붙였다. "카이 말이 맞아요. 그리고 아주머니의 걱정도 맞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만드는 규칙이 더 중요해요. 만약 우리가 '새로운 사람이 오면 규칙을 다시 논의할 수 있다'는, 규칙을 바꾸는 규칙까지 함께 만들어 둔다면, 나중에 친구들이 오더라도 혼란 없이, 우리가 정한 방식대로 함께 새로운 약속을 만들어갈 수 있을 거예요. 중요한 건, 규칙이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규칙을 바꾸는 방식조차도 우리 모두의 동의를 통해 정하는 것입니다." 홀 안에는 다시 침묵이 흘렀다.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살피며 고민했다. 어느 누구도 선뜻 노아의 말에 백퍼센트 동의하기는 어려웠다. 그게 제시한건 새로운 셰퍼드를 전지전능한 AI도 아닌 인간에게 맡기자는 말이었지만 동시에, 지난 며칠간 겪었던 끔찍한 혼돈을 끝낼 유일한 길이기도 했다. 마침내, 노아의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자신의 아들을 자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내 아들의 말을 믿겠소. 우리 스스로 우리의 대표를 뽑아봅시다. 더 이상 서로 싸우는 건 지긋지긋하오." 그의 말은 기폭제가 되었다. 여기저기서 동의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맞소! 한번 해봅시다!" "내 목소리는 저 젊은 친구에게 맡겨보겠네!" 물론 모두가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유다는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이었고, 마커스는 팔짱을 낀 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거대한 흐름이 바뀌었다는 것이었다. 무질서한 고함은 잦아들고, 그 자리를 새로운 도전에 대한 긴장과 기대가 채우기 시작했다. 노아는 연단에서 내려왔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했다. 그들은 오늘, 셰퍼드가 사라진 세상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첫 번째 사회적 합의를 이뤄냈다. 역사적인 첫 선거를 향한 문이, 마침내 열리고 있었다.
11장 - 첫 선거
그날 밤, 노아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중앙 홀의 임시 연단에 섰을 때 자신을 향하던 수십 명의 눈빛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비난과 불신, 그리고 희미한 기대가 뒤섞인 그 눈빛들의 무게에 어깨가 욱신거리는 듯했다. '대표를 뽑자'고 외치기는 했지만, 과연 그게 정답일까? 또 다른 형태의 셰퍼드를 만드는 일은 아닐까? 유다의 말처럼, 차라리 자신들 아르카이아 멤버들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편이 더 빠르고 효율적이지 않았을까. 고뇌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때, 누군가 조용히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에코였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노아의 옆에 앉아, 그와 함께 어둠에 잠긴 중앙 홀을 내려다보았다. "무서워?" 에코가 나지막이 물었다. 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옳은 일을 한 건지 모르겠어. 어쩌면 유다 말이 맞을지도 몰라. 우리 몇 명이 결정하는 게 더 나았을지도… 사람들은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아." 에코는 잠시 침묵하더니, 부드럽게 말했다. "노아, 넌 역사책을 많이 읽었지? 역사상 단 한 번이라도, 모든 사람이 완벽하게 준비된 상태에서 시작된 변화가 있었어?" "…아니." "그렇지? 변화는 언제나 혼란 속에서,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의 손으로 시작되는 거야. 중요한 건 완벽한 시작이 아니야. 잘못되었을 때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 그리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거지. 네가 오늘 한 일이 바로 그거야. 넌 사람들에게 '정답'을 준 게 아니라, 스스로 '정답을 찾을 기회'를 준 거야." 에코의 말은 노아의 마음속을 파고들었다. 그녀는 언제나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힘이 있었다. "그럼 너는? 너도 대표로 나갈 거야?" 노아가 물었다. 에코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 역할은 선수로 뛰는 게 아니야. 나는 심판이 될 거야. 모두가 공정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이 선거의 규칙을 만들고 사회를 보는 역할. 그게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니까." 에코의 격려에, 노아의 마음속을 짓누르던 무거운 돌덩이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그래, 혼자가 아니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해내면 되는 것이다. 선거날 아침, 도서관의 공기는 그 어느 때보다 무겁고 소란스러웠다. 어제의 합의는 새로운 기대를 낳았지만, 동시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퍼뜨렸다. 사람들은 중앙 홀에 모여 웅성거렸다. 가장 먼저 논의된 것은 '대표의 역할'이었다. 노아는 연단에 올라, 칠판에 큼지막하게 글씨를 썼다. <우리의 대표> 1. 권한: 공동체의 중요한 업무(자원 분배, 경비, 탐사 등)를 결정한다. 2. 책임: 모든 결정은 특정 개인이 아닌,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위해야 한다. 3. 임기: 밭에서 네 번의 수확을 거둘 때까지. 그 후에는 다시 모두의 평가를 받는다. "대표는 왕이 아니에요." 노아가 설명했다. "우리의 목소리를 대신 내주고, 가장 어려운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에요. 우리는 대표에게 '권력'을 주지만, 그 권력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릅니다. 그리고 그 힘은 영원하지 않아요. 임기가 끝나면, 우리는 다시 모여 대표가 일을 잘했는지 평가하고, 새로운 대표를 뽑거나, 아니면 계속 맡길지 결정해야 해요. 이것이 우리의 '권리'입니다." 권력, 책임, 임기, 권리. 셰퍼드 아래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낯선 단어들이었지만, 사람들은 어렴풋이 그 의미를 이해했다. 곧이어 후보 등록이 시작되었다. 예상대로, 마커스가 가장 먼저 나섰다. "규칙은 최소한으로! 배급은 최대한으로! 나를 뽑으면 매일 복숭아 통조림 파티를 열어주겠소!" 그의 공약은 단순하고 자극적이어서, 아이 같은 어른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다음은 경비조 리더 마틴이었다. "안전이 먼저다! 나는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여러분을 지키고, 내부의 질서를 바로 세우겠소. 강력한 규칙만이 우리를 살릴 길이오." 그의 주장은 안정감을 주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셸터의 통제를 떠올리게 했다. 모두가 두 후보 중 한 명을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 리나의 아버지 레오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저는… 노아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그의 말에 홀 안이 술렁였다. 레오는 연단에 올라, 지난 며칠간의 일을 이야기했다. 아나키 부족에게 쫓길 때, 모두가 침묵하려던 순간 문을 열어준 노아의 용기. 아픈 딸을 위해 통신으로 의학 지식을 구해온 노아의 지혜. 그리고 혼란스러운 회의 속에서 모두의 두려움을 먼저 알아주었던 노아의 공감 능력. "우리에게 필요한 대표는 가장 목소리가 큰 사람도, 가장 힘이 센 사람도 아닙니다. 가장 지혜롭고, 가장 용기 있으며, 우리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입니다. 저는 제 가족의 목소리를, 노아에게 맡기고 싶습니다." 레오의 진심 어린 연설에, 노아의 부모님과 그에게 도움을 받았던 다른 사람들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카이아 멤버들 역시 말없이 노아를 지지하는 눈빛을 보냈다. 노아는 당황했지만, 자신을 향한 수십 개의 눈빛 속에서,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다. 후보 등록이 끝나자, 에코가 사회자로서 연단에 섰다. 그녀는 칠판에 적어두었던 투표 방법들을 가리켰다. "이제, 우리의 첫 번째 대표를 어떤 방식으로 뽑을지 결정해야 합니다. 여기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손들기, 구슬 투표, 그리고 종이에 표시하기."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마커스가 외쳤다. "손들기가 가장 확실하고 빠르지! 누가 누굴 뽑는지 봐야, 나중에 배신자를 가려낼 수 있고 말이야!" 그의 말에 몇몇이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레오가 즉시 반박했다. "아니오. 그렇게 되면 힘센 사람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된 선택을 할 수 없소. 모두가 자신의 생각을 소신껏 밝힐 수 있어야지." 사람들이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에코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레오 씨의 말씀이 맞습니다. 거수는 가장 빠르지만, 다른 사람의 시선 때문에 자신의 진짜 생각을 표현하기 어려워지게 할 수 있습니다. 반면 비밀 투표는, 외부의 압력 없이 오직 자신의 판단에만 집중하게 해주죠. 우리의 첫 번째 선택인 만큼, 가장 공정한 방법으로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에코의 차분한 설명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결국, 다수의 동의 아래 그들은 가장 공정하고 비밀이 보장되는 '비밀 기표' 방식을 택하기로 결정했다. 투표는 에코의 사회 아래, '비밀 기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낡은 도서 대출 카드를 투표용지로 삼고, 사람들은 숯 조각으로 지지하는 후보의 이름(혹은 알아볼 수 있는 그림)을 적어 낡은 양동이에 넣었다. 생애 처음으로, 그들은 셰퍼드가 아닌 자신의 의지로 무언가를 결정하고 있었다. 그 작은 종잇조각 하나에, 공동체의 미래가 달려 있었다. 마침내 개표가 시작되었다. 에코가 양동이에서 투표지를 한 장씩 꺼내 펼쳐 보이며 이름을 불렀다. "마커스… 노아… 마틴… 노아… 노아…" 초반에는 세 후보의 표가 엇비슷하게 나왔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노아의 이름이 불리는 횟수가 점차 늘어났다. 마커스의 얼굴은 굳어갔고, 마틴은 굳은 표정으로 결과를 받아들였다. "총 투표자 78명 중… 노아, 45표. 이상으로, 우리 공동체의 첫 번째 대표는 노아로 선출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에코의 선포와 함께, 홀 안에서는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노아를 지지했던 사람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기뻐했고, 반대했던 이들도 마지못해 결과를 받아들였다. 노아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연단에 올라섰다. 그는 더 이상 평범한 소년이 아니었다. 수십 명의 삶과 공동체의 미래를 짊어진, 이 새로운 세상의 첫 번째 대표였다. 그의 어깨는 기쁨보다, 별들만큼이나 무거운 책임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노아는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향해, 떨리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여러분의 대표로서, 모두를 위한 규칙을 만들겠습니다. 혼자가 아니라, 여러분과 함께요." 그것은 화려한 약속이 아닌, 무거운 책임에 대한 다짐이었다.
12장 - 평의회 결성
노아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박수와 환호 속에서 어색하게 서 있었다. 그는 더 이상 평범한 소년이 아니었다. 수십 명의 삶과 공동체의 미래를 짊어진, 이 새로운 세상의 첫 번째 대표였다. 그의 어깨는 기쁨보다, 별들만큼이나 무거운 책임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노아는 대표로서의 첫 번째 업무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 또 다른 형태의 셰퍼드가 되는 길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아르카이아 동료들과, 각 그룹에서 신뢰를 얻고 있는 마틴, 레오, 그리고 선거 결과에 승복하고 공동체를 위해 일하겠다고 밝힌 마커스까지 불러 모아 '임시 평의회'를 구성했다. "제가 대표이긴 하지만, 저 혼자 모든 것을 결정할 수는 없어요. 우리 공동체의 중요한 문제는, 여기서 함께 논의하고 결정했으면 합니다." 그의 제안에 모두가 동의했다. 그렇게 도서관의 작은 회의실에서, 인류의 첫 번째 국회가 그 서막을 올렸다. 하지만 그들 앞에는 새로운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회의를 위한 규칙이 없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동시에 말하고, 의견은 하나로 모이지 않았다. 노아는 역사책에서 읽었던 지식을 바탕으로, 회의를 위한 최소한의 규칙을 제안했다. "가장 먼저, 회의를 공정하게 이끌어갈 '의장'이 필요해요. 그리고 의장의 허락을 받은 사람만, 정해진 시간 동안 발언하는 겁니다." 그들은 토론 끝에, 의장을 선출하기로 했다. 노아는 마커스를 지지했다. 그의 불만을 잠재우고, 그에게 책임감을 부여하는 것이 공동체를 위해 더 나은 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결국, 평의회는 마커스를 첫 번째 임시 의장으로 선출했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어리둥절했던 마커스는, 의장석에 앉자 어깨를 펴고 제법 진지한 얼굴로 회의를 이끌기 시작했다. 질서가 잡히자, 그들은 마침내 가장 시급한 안건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바로 '자원 관리 및 배분법'이었다. 치열한 토론이 이어졌다. 이전처럼 고성이 오가지는 않았지만, 각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날 선 의견들이 오갔다. 마침내 노아의 아버지가 제안했던, '기본 배급 보장, 위험 노동에 대한 추가 보상, 약자 우선 배려'라는 세 가지 원칙을 담은 수정안이 최종 표결에 부쳐졌다. 표결 직전, 노아는 평의회 모두에게, 그리고 회의를 지켜보는 모든 사람에게 설명했다. "이 법안은 단순히 통조림을 아끼자는 게 아니에요. 세나가 분석한 것처럼, 우리 아이들이 병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자라기 위해 꼭 필요한 영양소를 지키기 위한 약속입니다. 지금 당장 맛있는 것을 조금 포기하는 대신, 우리 모두가 더 오랫동안, 더 건강하게 함께 살기 위한 규칙입니다." 그의 진심 어린 설명에, 사람들은 비로소 이 법안의 진짜 의미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표결을 시작하겠습니다." 의장석에 앉은 마커스가 선포했다. 평의회 의원들은 각자 찬성과 반대를 의미하는 흰 돌과 검은 돌 중 하나를 집어 들어 보이지 않게 손에 쥐었다. 그리고 차례로 나와, 불투명한 상자 안에 자신의 돌을 넣었다. 모두가 숨죽인 가운데, 마커스가 상자 안의 돌을 하나씩 꺼내 수를 세기 시작했다. "찬성… 하나, 둘, 셋… 여덟." "반대… 넷." "찬성 여덟, 반대 넷으로, 제1호 법안, '자원 관리 및 배분법'은 가결되었습니다!" 회의실 안에서,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중앙 홀의 모든 사람들에게서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노아는 사람들에게 '가결'의 의미를 설명해주었다. "이것은 우리의 대표들이, 이 새로운 약속에 공식적으로 동의했다는 뜻입니다. 이제부터 이것은 우리 공동체 모두가 함께 지켜야 할 첫 번째 법입니다!" 그날 이후, 도서관에는 진정한 질서가 찾아왔다. 식사 시간이 되면, 사람들은 더 이상 아귀다툼을 벌이지 않았다. 그들은 스스로 만든 법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줄을 서서, 자신의 이름이 불리면 정량의 음식을 공평하게 배급받았다. 농사일이나 경비 같은 힘든 일을 한 사람들은 약속된 추가 배급을 받으며 뿌듯해했고, 다른 이들도 그들의 노고에 박수를 보내며 인정해주었다. 도서관은 더 이상 단순한 생존 공간이 아니었다. 낮에는 솔라의 지휘 아래 농경팀이 밭을 일구었고, 기어와 유다는 발전기와 정수 시설을 점검하며 공동체의 생명줄을 유지했다. 마틴이 이끄는 경비조는 더 이상 내부의 다툼을 말릴 필요 없이, 도서관의 경계와 외부 정찰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어 평화로웠다. 중앙 홀의 한쪽에서는 에코가 아이들을 모아놓고 글자를 가르쳤고, 어른들은 난생 처음으로 서가의 책을 꺼내 읽으며 새로운 지식을 탐하는 기쁨을 누렸다. 도서관은 희망을 키우는 공동체로 거듭나고 있었다. 평의회에서는 다음 단계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카이가 낡은 도시 지도를 펼치며 말했다. "우리의 생존은 저 발전기에 달려있어. 하지만 연료는 한정되어 있지. 기록에 따르면, 이 근처에 구시대의 주유소가 몇 군데 있어. 연료가 남아있을 확률은 희박하지만, 확인해 볼 가치는 있어. 자원 확보를 위한 정찰대를 꾸려야 해." 그의 제안은 도서관의 지속 가능성을 위한 새로운 계획의 시작이었다. 며칠 뒤, 평화로운 저녁이었다. 대표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도서관 곳곳을 점검하던 노아는, 발전기실에서 땀 흘리고 있는 기어를 찾아갔다. 기어는 렌치로 부품을 조이며 툭 던지듯 말했다. "이상하단 말이지. 유다는 태양 흑점 폭발 같은 외부 충격이 원인일 거라고 하던데, 그렇다면 셸터 안에 비상 발전기고 뭐고 전부 타버렸어야 정상이야. 근데 이상하게 셰퍼드와 관련된 시스템만 깔끔하게 터졌단 말이지. 자연 현상이라고 보기엔 너무 이상해." 하지만 기계에 큰 관심이 없었던 노아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원래 비상 상황을 대비해서 그렇게 만들어진 거 아닐까? 덕분에 우리가 살아남은 거잖아." 그는 기어의 심각한 표정을 눈치채지 못한 채, 다른 곳을 돕기 위해 자리를 떴다. 이후 노아는 유다가 셸터에서 가져온 장비들을 정리하는 것을 돕고 있었다. 어지럽게 널린 부품들 사이에서, 그는 가방 깊숙한 곳에 있던 반으로 접힌 낡은 사진 한 장을 우연히 발견했다. 사진 속에는, 환하게 웃고 있는 세나와, 그녀의 품에 안겨 꼬리를 흔드는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있었다. 노아는 세나가 잃어버렸던 바로 그 반려견임을 알아보았다. 그는 그저 유다가 세나를 위해 사진을 챙겨왔다고 생각하며, 별 의심 없이 사진을 다시 유다의 가방에 넣어주었다. 노아는 사진을 넣어준 뒤, 도서관 중앙 홀에서 평화롭게 웃고 떠드는 사람들을 보며 이 평화가 계속되기를 바랐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위이이이이잉-! 도서관 전체에,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날카로운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축제를 즐기던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순식간에 멎고, 공포에 찬 정적이 홀을 감쌌다. 옥상에서 망을 보던 경비조 리더 마틴이 무전기를 통해 다급하게 외쳤다. 그의 목소리는 다급함을 넘어선 경악에 차 있었다. "광장이다! 광장 남쪽! 무장한… 무장한 자들이 나타났다! 그런데… 이상해! 이건… 이건 말이 안 돼!" "마틴! 정신 차려! 무슨 일이야!" 카이가 무전기를 낚아채 소리쳤다. 노아는 다른 아르카이아 멤버들과 함께 가장 가까운 창가로 달려갔다. 그의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수십 명의 아나키 부족 전사들이 도서관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은 이전에 봤던 무자비한 사냥꾼의 모습과는 달랐다. 그들은 무기를 땅에 끌며, 마치 장례 행렬처럼 질서정연하고 엄숙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적의가 아닌, 기묘한 경외감마저 서려 있었다. 그리고 그 행렬의 가장 선두, 부족의 리더로 보이는 자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공격하려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보여주려는 듯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에는, 이 폐허의 세상에서는 절대 존재할 수 없는 물건이 들려 있었다. 바로 셰퍼드 시대의 홀로그램을 투사하는 소형 단말기였다. 그리고 그 단말기는,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부족의 리더가 단말기를 조작하자, 푸른 빛줄기가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그리고 그 빛은 도서관의 외벽에, 모든 셸터 주민들이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하나의 이미지를 그려냈다. 그것은 양들을 이끄는 목동의 지팡이 모양을 한, 바로 셰퍼드의 로고였다.